십이국기 AU. 왕 이와이즈미, 기린 오이카와.
이전글. 바다무덤, http://lov-boom.tistory.com/178
* 바다무덤에서 이어지는 글로 대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원작의 대국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여왕予王은 원작에서 기린을 사랑해서 나라를 망하게 한 경국 왕입니다. 기린이 실도의 병을 앓자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왕으로는 실격이지만 저는 여왕 이야기를 꽤 좋아해요.
* 기린은 자비의 동물로 피를 싫어합니다.
* 타이키는 대국 기린을 칭하는 말입니다.
파도치는 광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바다가 뱉어낸 토사물 탓이었다. 해안가에 부서진 뱃조각이 널려있고 퉁퉁 불어버린 시체며 주인 잃은 신발 같은 것들이 가득 떠밀려 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 주저앉아 누구는 울고, 누구는 달래고, 누구는 바다와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들의 분노는 모두 바다 어딘가 돌아다니는 해적과 요마에게 쏠려있었다.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두 남자가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가벼운 천 옷을 입었으나 한 쪽이 쥐고 있는 칼 장식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거지며 말씨가 이곳 어부와는 다른 데가 있어 위화감을 풍겼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만큼이나 마을에 슬픔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와쨩, 혹시 울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와이즈미는 옆을 힐끗 보다가 다시 해안선을 응시했다. 바다 너머에서 해적들은 자기네들이 얻어낸 물건을 세며 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와이즈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울다니.”
“그야, 고향이잖아.”
“삼백년 전의 고향이지.”
그 말에 오이카와는 다시 몸을 세우며 “그렇게나 되었나.”라고 중얼거렸다. 그래, 태왕의 치세가 정확히 300년이 되는 해였다. 백성들은 성군이 나셨다며 술판을 벌이고 춤을 췄다. 그 누구의 생일잔치도 이보다 호사롭고 기쁨이 넘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 잔치에서 주인공만 쏙 빠져있었다. 삼 년 전, 류의 왕이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류와 인접한 해안가에서 해적과 요마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믿을만한 사람을 보냈을 테지만 오이카와가 나서 직접 가보겠노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위험한 곳에 기린을 혼자 보내겠느냐고 화를 내자 뻔뻔한 얼굴로 “이와쨩이랑 같이 갈 건데?”했다. 무언가 복잡한 절차가 있었으나 기린의 태도가 너무 강경하고 축제와 다름없는 시기이다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넌 참 못된 기린이야.”
“뭐가 어때서.”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가자.”
이와이즈미는 해안가로 더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이곳 관리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걸음을 마저 옮기지 않았다. 여전히 해안가를 멍하니 보고 서있다.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찌푸리며 “오이카와.”하고 재촉을 했다.
“난 저기로 갈래.”
오이카와가 말한 곳은 해안가였다. 아직도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그 아수라장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와이즈미는 짐짓 엄한 얼굴을 하고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하고 말해다. 그래도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난 저기 갈래.” 삼백년이 흘러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이와이즈미는 한 손을 이마에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저 사람들이 지금 왕이랑 기린을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알아?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수도 쪽에 사는 사람과는 달라.”
“알아.”
“널 오냐오냐 해줄 사람들이 아니라니까?”
“안다니까! 내가 알아서 잘 할게. 난 머리도 갈색이니까 기린인 줄 모를 거야.”
그야 그렇다. 대의 기린이 갈색 갈기를 가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금발과 달리 갈색 머리는 아주 흔했다.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더니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해적이 오면 무조건 도망쳐.”
“에, 싫어. 사령도 있는데.”
저게 어딜 봐서 얌전히 잘 다녀오겠다는 사람의 태도인가? 하지만 오이카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기린은 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도 그러했다. 그는 오이카와에게 열 번이 넘도록 확인을 받고 볼일이 끝나면 곧장 자기를 찾아오라 말했다. 잘 귀담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손을 흔들더니 해안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도 저잣거리에서 잘 섞여 놀곤 했으니 어부들 사이에서야 별 일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해적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서둘러 일을 보고 오이카와와 합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와이즈미 또한 자리를 떴다.
지역 관리는 쇼라는 여자였다. 왕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과한 향이며 차를 준비되어있었는데 낡은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애초에 이와이즈미는 이런 짙은 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냄새를 맡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서 진상품으로 들어올 때마다 오이카와에게 주고는 했다. 하지만 애써 준비한 것을 물리라 하기도 머쓱하여 숨 한 번 내쉴 뿐 그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적이나 요마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히고 있으며 준비한 대책은 있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다. 한참이나 설명하던 관리는 소매로 슬며시 이마를 닦았다. 가만 보니 얼굴 가득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단박에 그녀가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관리는 머뭇거리다가 “송구합니다. 한 가지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긴장하지 말라고 말해봐야 역효과라는 것은 지난 삼백년간 수없이 익혔기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관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여 주셨는지 궁금하여…….”
그녀는 또 다시 땀을 닦았다. 이와이즈미는 턱을 괴고 그 모양새를 구경했다.
“그냥. 별 거 아니야.”
“아, 소신이…….”
기껏 용기 내어 물어놓고는 별 거 아니라는데 참 납득이 가겠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내 기린이 바다 구경이 하고 싶은 모양이라서 말이야. 그렇게 조르면 통 이길 수가 없지.”
그러자 이번에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얼굴에 당혹감이 잔뜩 서려있다. 이와이즈미는 그 얼굴의 까닭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삼백년의 세월이 일러주어다. 이와이즈미는 웃으며 “계속하지.”라고 말했다. 그제야 관리는 다시 착실하게 자기 일을 수행했다.
관리가 보낸 시선은 이 나라 백성 모두가 지닌 불안과 모양이 같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롭게도, 이와이즈미는 영원히 실도 하지 않을 왕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물욕이나 자비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으니 영원히 샛길로 새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왕予王과 같은 끝을 맺으리라 보는 이들도 있었다. 여왕은 자신의 기린을 사랑한 나머지 나라 안의 여자들을 모두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사랑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왕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음은 당연지사였다. 그 이름은 지금 이와이즈미의 그림자를 착실히 밟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왕이 기린을 너무 아낀다는 말이었다.
오이카와가 그를 듣고 좋아한 것은 굳이 숨길 일도 아니다. 그는 이따금 성 아래로 내려가 임금님의 기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오고는 했다. 그 중에는 과장된 이야기도 제법 있어 듣고 있으면 코웃음이 나오는 것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걸 주워 담아 이와이즈미의 귓가에 재잘거리고는 했다.
“이와쨩, 그거 알아? 태왕은 기린이 너무 예뻐서 하루 종일 업고 다닌대.”라거나 “밥을 직접 떠먹여준다는 것 있지?”, 혹은 “정무를 볼 때 옆에 세워놓지 않고 자기 무릎에 앉혀놓는대!” 같은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있지, 대국 기린은 밤에 태왕이랑 꼭 끌어안고 잔다나봐.”라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누가 감히 내 침소를 엿보는 거지? 다 잡아다가 목을 쳐야겠네.”
이와이즈미가 그렇게 말하면, 오이카와는 미쳤냐고 길길이 날뛰다가 팔을 꽉 잡았다.
“주상, 오늘부터 소문을 하나씩 실천해봅시다. 업어주세요, 네?”
“네가 안국 기린처럼 조그마하면 모를까.”
“내가 그 기린보다 한참이나 애야!”
삼백년 묵은 애라니. 징그럽기도 하지.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쓰면서도 오이카와를 내쫓는 일이 없었다. 이렇듯 정무를 볼 때도 함께하고 쉴 때도 기린과 함께 산책을 하고, 침소에 들 때도 종종 함께하니 소문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가끔 소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때면 오이카와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왕은 뭘 해도 트집 잡히게 되어있어. 기린을 너무 사랑한다니, 트집 치고는 낭만적이잖아.”
그러면 이와이즈미 또한 납득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시종이나 다른 근원지를 찾으려는 노력을 관뒀다. 어차피 소문이 진실에 가까운 이상 막으려 할수록 혼란스러워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소문을 듣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충격의 차이가 클 것이다. 특히나 류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지역의 관리라면 더했다. 하지만 오해라며 달래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이 거의 끝나갈 쯤이라 슬슬 오이카와 생각이 들었다. 당황한 관리를 보면서 오이카와가 언제쯤 이곳에 올지 생각했다. 뭘 했냐고 묻고, 또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도 하고……. 그렇게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흐를 때였다.
누군가 문밖에서 다급하게 해적이 나타났다고 외쳤다.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 틈새로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한 편 오이카와는 그 해적을 대면하고 있었다. 해적이면 바다에서나 도적질을 할 것이지,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해안가까지 기어들어왔다. 어부들이 기겁하는 사이 오이카와는 사령을 내보내 해적을 견제했다. 아직까지는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지만, 해적들이 선을 넘는 순간 오이카와의 사령들은 저들을 공격할 것이다. 갑자기 쳐들어온 해적과 사령을 부리는 여행자 때문에 해안가의 공기가 복잡하게 바뀌었다. 이 나라에서 사령을 지니고 갈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해적들은 당황한 듯 했으나 물러서기는커녕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마치 등 뒤로 낭떠러지가 펼쳐진 사람들 같았다. 사령은 당장이라도 해적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오이카와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다가 사령 하나에게 “이와쨩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봐줘.”하고 말했다.
이대로 대치 상태가 깨지지 않길 바랐으나 등 뒤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마을 경비대가 소집된 것이다. 불길이 일자 해적들은 미친 듯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이카와는 사령에게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사방에서 악에 받친 비명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피 냄새가 온갖 곳에서 터졌다. 소매로 코를 막고 애써 사령을 움직였지만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목을 타고 피비린내가 꿀렁꿀렁 넘어오는 듯 했다. 갑작스레 눈앞으로 거뭇한 것이 달려들었을 때, 그리고 그 목이 꿰뚫렸을 때, 피가 솟는 광경이 점점이 끊어지듯 보였다. 그렇다하여도 눈앞에 선 등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오이카와는 지독한 피 냄새에 눈을 가물게 뜨며 아, 이번에는 많이 혼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을 뜬 것보다 피 냄새에 인상을 쓴 것이 먼저였다. 그에 섞여 바다의 깊은 냄새도 났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은 채로 누운 자리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거친 손이 오이카와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안도는 잠시뿐이다. 눈을 슬그머니 떴을 때 보인 얼굴이 어찌나 도깨비 같던지, 오이카와는 기운 없이 헤 웃고 말았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지.”
“이미 한 번 죽을 뻔했는걸.”
“반성하는 척이라도 할 수는 없는 거냐?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일어나자마자 쏟아지는 잔소리에 오이카와는 그저 웃을 뿐이다. 입으로는 사나운 소리를 뱉어도 마주 쥔 손은 따뜻하고 손가락이 아릴만큼 든든했다. 이와이즈미는 문 너머로 따뜻한 물을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그 사이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다시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돌아올 쯤, 오이카와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
“아니, 그냥. 잘 해결 되었나 해서.”
그 말에는 꽤 많은 물음이 담겨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중 일부만 말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안전해. 한동안은 계속 그럴 거야.”
오이카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야 혼나기만 할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뺨에 손등을 댔다. 덤덤한 얼굴을 하고서 손은 언제나 다정했다. 열이 좀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가득 바라는 얼굴을 한다.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쓰며 “뭘 잘했다고?”하고 성을 냈다. 하지만 이 뻔뻔한 기린은 이런 일에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면서도 오이카와에게 입을 맞췄다. 깊이도 분위기도 없는 짧은 입맞춤에 오이카와가 허무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말을 잘 들어야 예뻐해 주지.”
“주상, 저는 늘 예뻐서 그럴 필요가 없답니다.”
“타이키께서 팔팔한 것 같으니 난 다른 일을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아, 이와쨩! 잘못했어!”
오늘 내내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을, 이만 가겠다고 하니 넙죽 뱉는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정말로?”하고 물었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기에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지금이야 시간이 나지만 나중에는 가봐야 해.”
“성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바빠?”
“빨리 처리하고 자리로 돌아가야지.”
이토록 맞는 말에는 대꾸할 답도 없다. 이와이즈미의 초조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한 시종이 따뜻한 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받아들며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 시종이 나가자 직접 잔에 물을 따른다. 김이 조금씩 올라오는 물이 보기만 해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들어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있지.”
“응.”
“이와쨩이 왕이 아니고, 내가 기린이 아니면……. 하루 종일 간호해줘도 되나?”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그러지 말고.”
오이카와의 채근에 이와이즈미는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금방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참이나 늦다. 심지어 고심 끝이 나온 답은 “아니.”였다. 오이카와는 잔뜩 실망한 얼굴을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단호했다.
“물고기 잡으러 가야지.”
“물고기?”
“그래, 물고기. 그래야 아픈 놈 밥이라도 해먹이지.”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와이즈미는 사뭇 진지했다.
“가족이 아프다고 일을 빼먹으면 동료들이 힘들잖아.”
그러니까 이건, 삼백년 전의 이야기다. 이와이즈미가 왕이 되기 전, 그의 가족과 동료가 모두 살아있고 그의 고향이 아직 바다이던 시절. 이와이즈미는 새벽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그는드문드문 상상을 이어나갔다.
“옆집에 살던 녀석이 엄청 애처가였어. 아내는 집에서 바느질을 했는데 무지 서툴렀거든. 자주 바늘에 찔려서 손이 난리였어. 그때마다 녀석이, 아내가 손을 다쳐서 밥 차려줄 사람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거야.”
“뭐야, 일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고?”
“아니야. 그러니까 더 웃긴 놈이지.”
이와이즈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삼백년 전 일인데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한 번은 우리가 참다못해 화를 냈더니, 그 집 아내가 맛있는 걸 해들고 바다까지 나왔어. 직접 담은 술도 있었는데, 바느질은 못해도 요리는 잘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그 뒤로는 바느질 대신 식당을 했을 걸? 그래도 아내가 아프면 어김없이 일 빼먹었지만…….”
모두 죽은 사람의 이야기다. 바다를 무덤 삼은 이들에 대한 애정이 그의 안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감정을 헤아리다가 “나도.”하고 운을 뗐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말에 귀를 기울이듯 시선을 잠잠하게 가라앉혔다.
“나도 아프면 바다에 가지 말고 옆에 있어줘.”
“그럼 네가 다음 날 새벽에 술이라도 들고 찾아가주게?”
“뭐든 하지 뭐. 아픈 날 혼자 있는 것도, 이와쨩이 미움 받는 것도 싫은 걸. 나도 배우면 다 할 수 있어. 엄청 똑똑하잖아.”
그 말에 이와이즈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탁 트인 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자기 왕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조금 사나워 보이는 이 거뭇한 얼굴이 이제는 정말 왕의 것이었다. 바다로 돌려보낸다 하더라도 어부가 될 수는 없다. 이와이즈미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익숙한 듯 태연한 얼굴로 “뭘 그렇게 봐?”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젓다가 “내일 새벽에 바다 가자.”하고 말했다.
“곧 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 전에 한 번만.”
애절한 부탁에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누군가 그리 말해주기를 바란 것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에 오이카와 또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이 오기까지는 제법 길었다. 사실 이와이즈미는 이런 일 저런 일 하였으니 그리 길지 않았겠지만 오이카와는 아직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이유로 계속 방안에만 있어야 했다. 배를 빌리는 것도 관리에게 부탁을 해두었더니 금방 해결이 되었다. 그러니 향에 잠길 것 같은 방에 누워 흐르는 시간을 가늠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반나절을 잠으로 보냈기 때문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일을 마친 이와이즈미가 자는 동안 그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따라 벌렸다가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찌푸리면 같이 이마를 찡그렸다. 이상하게도 그게 제법 재미있어서, 턱을 괴고 심각한 얼굴로 ‘요새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없었던가?’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다른 곳으로 보냈던 사령이 돌아와 류의 기린은 아직 왕을 찾고 있노라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봉래에도 가볼 참이라고 했다. 그러자 들떴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왕을 찾지 못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발밑이 푹 꺼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옆을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나의 왕.”
그 말이 가진 울림은 오로지 기린만이 알 것이다.
오이카와는 오늘도 이와이즈미의 어깨에서 바다를 읽었다.
밤을 꼬박 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눈을 감은 새에 잠이 든 모양이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눈을 떠 오이카와를 깨웠다. 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둘이서만 바다로 갔다. 이와이즈미의 걸음이 평소 산책할 때보다 조금 빨랐기 때문에 오이카와 또한 걸음을 서둘러야 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제 사령에게 들은 이야기가 계속 맴돌아 그 말만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와쨩, 하고 부르니 걸음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자기가 너무 서둘러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머쓱해하는 것을 모른 척하고 “어제 말이야.”하고 말머리를 열었다.
“류의 기린이 아직도 왕을 못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이번에는 걸음이 완전히 느려진다. 그리고는 자기 목을 만지며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골몰히 생각에 빠진 얼굴이라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멀뚱히 섰다.
“그런가. 두 번째 왕인가.”
“응. 기린은 살아남았으니까.”
멍하니 앞서 걷던 이와이즈미가 뒤로 손을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별 일이라고 웃으면서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조용하고 어둑한 새벽길을 따라 걷다보니 금방 바다가 보였다. 파도치는 소리도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걸음을 잠시 세웠다가 배를 발견하고서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서로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것은 조금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와이즈미나 힘들었지, 나중에 배에 오르는 오이카와는 따라 올라가기가 더 수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아주 조금만 배를 저었다. 이와이즈미는 너무 오랜만이라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해 오이카와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동이 트기 전에는 해안가에서 제법 멀어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바다에 둥둥 뜬 것이 신기하여 자꾸만 감탄사를 뱉었다.
“너 나 처음 만난 곳도 배 위였잖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걸. 기린이 뭐 하러 배를 타.”
“그건 그렇지.”
이와이즈미는 노를 젓다가, 혹은 말을 하다가 자꾸만 넋을 놓았다. 수평선 너머로 오르는 태양을 눈부신 줄 모르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돌연 바다로 퐁당 빠져 들까봐 오이카와는 조금 겁을 먹었다. 바다에 가보자 한 일이 조금 후회되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발끝으로 이와이즈미의 발을 톡 쳤다. 그러자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래도 여전히 시선이 잠잠했다.
“류의 왕, 괜찮은 사람이었지.”
넋을 놓은 끝에 꺼낸 말이 그것이다. 오이카와는 자기 뺨을 문지르며 “그렇지.”하고 답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자살은 생각도 못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길고 긴 시간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놓는다. 왕은 땅을 풍요롭게 한 만큼 황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와이즈미를 볼 때면 도저히 그 끝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건 모든 기린이 걸어온 절망이다.
“나도 언젠가 백성을 괴롭힐 날이 올 거야.”
“이와쨩은 안 그래.”
오이카와의 단호한 말에 이와이즈미는 한 번 웃었다.
“모든 왕에게는 끝이 있어.”
계속되는 말에 오이카와는 잔뜩 심통이 난 듯 대꾸가 없었다. 이번에는 이와이즈미 쪽에서 오이카와의 발을 툭 치며 “들어봐.”라고 말했다.
“난 언젠가 나라를 버릴 거야.”
“아니라니까.”
“체념이 아니라 결정이야. 나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날 거야. 하늘이 나를 버릴 때까지 너와 왕과 기린이 아닌 채로 살아보고 싶어.”
오이카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모른 척 하며 아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죽으면 넌 새 왕을 찾아야 해. 그러니 네게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이제 그가 하고자하는 말을 알았다. 이와이즈미가 차분히 말을 꺼낼 때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얀 얼굴 가득 웃음이 꽃처럼 피었다.
“내 왕은 이와쨩 한 사람뿐이야.”
마치 오래도록 그런 끝을 꿈꿔온 사람처럼 웃는다. 그 애살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 찾아올 실도의 첫 걸음이 오이카와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끝에 오이카와가 홀로 남아 다른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을 거라 생각하면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그 때가 아니었다. 길을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삼백년을, 그리고 다시 삼백년을 이대로 살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자질보다는 그 한없는 욕망을 더 신뢰했다. 어쩌면 하늘의 뜻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이카와가 웃는다. 하늘이 정성스레 빚어 선물한
나의 기린, 그것은 오로지 왕만이 아는 울림이었다.
'하이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바보로봇(1) (2) | 2016.01.24 |
---|---|
[카게스가] 겨울 엽서 (0) | 2015.12.22 |
[이와오이] 낙서 (0) | 2015.10.27 |
[이와오이] 무화과 꿈 (2) | 2015.10.18 |
[이와오이] 얼룩 (이와오이 교류회) (0) | 2015.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