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넘어가 있었다. 핸드폰을 꽉 잡은 채로 건물 앞을 서성였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조의금으로 낼 현금을 준비하지 못했고, 이 시간에 가족 아닌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또 이와이즈미의 아내가 나의 애도를 원할 것 같지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와이즈미를 본 지가 벌써 사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그간 이와이즈미가 수도 없이 약속을 잡으려고 했으나 매번 에둘러 거절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사 년 전에 멈춰있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사방에 빛이라고는 가로등 몇 개가 전부였기 때문에 액정에 눈이 따끔거렸다. 그 중에서 이와이즈미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메시지를 넣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지금 건물 앞이야.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올까?’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와이즈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도착은 했는지, 너무 급하게 부른 것은 아니었는지 끊임없이 염려할 것이다. 그는 줄곧 그래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와이즈미의 잔소리를 되뇌었다. 끼니를 잘 챙겨야한다, 늦게 자지 마라, 우울하면 혼자 앓지 말고 연락을 해라,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홀로 외울 정도가 되었건만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건물 안쪽으로부터 빛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사라지고,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건물 앞에 선 검은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조금 기울여 이쪽을 살피더니 천천히, 어느 순간부터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보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준비해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많이 힘들었지. 별로 위로는 안 되겠지만……. 이런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었는데, 이와이즈미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일으켜져 가로등 아래로 끌려갔다. 그가 걸음을 세운 후에야 간신히 왜 그러냐는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이제 보여.”
이와이즈미는 안도하듯 숨을 뱉었다. 가로등의 역광 탓인지 그 뺨이 어둡고 메말라보였다. 늘 반듯하고 단단하던 어깨도 무거워보였다. 그 외에는 모두 그대로였다. 꼭 사 년만이었는데, 머리길이조차 그때와 꼭 같았다. 내가 이와이즈미를 살피듯, 그 또한 나를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이 내 눈과 코를, 입과 뺨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 팔을 잡은 이와이즈미의 손이 조금 풀어지면서 손끝이 저려왔다.
“왜 그랬어?”
내게 그럴싸한 변명이 없다는 것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추궁이 아니다. 협박인 동시에 애원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사 년이나 고민해왔으나 단 한 마디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연애를 했다거나, 일이 많이 바빴다거나, 은퇴를 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거나……. 이와이즈미가 원하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간신히 들고 이와이즈미의 턱 끝을 응시했다.
“이제 안 그럴게.”
이 또한 다짐이나 약속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허탈한 것이었다. 힘 빠진 답이었으나 이와이즈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째서 의논도 없이 덜컥 은퇴를 한 거냐며 혼을 내지도 않았다. 연락두절에 대한 대가로는 제법 선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상복으로 입은 정장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지폐 몇 장을 내게 쥐어주었다. 이게 뭐냐는 듯 쳐다보니 “우리 집에 가서 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자면 불편할 테니까.”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나를 이끌어 병원 바깥쪽으로 향했다. 어디로 전화를 거나 싶었는데 택시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이와이즈미는 새로 방을 구할 때까지는 자기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것이 과연 권유의 범주에 있는지 생각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내일 들를 때 렌을 집에 데려가줘. 분위기 때문인지 애가 잠을 통 못 자.”
그 또한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택시가 오고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하고, 이와이즈미는 더 할 말이 없는지 나를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아 손등으로 훔치며 바싹 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와이즈미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지는 것과 동시에 말했다.
“더 혼낼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을 내지르는 일까지 각오를 한 바였다. 그만큼 그동안 쌓아온 것이 견고해서 그랬다. 그걸 차츰 갉아먹은 것은 나였으니, 그 어떤 원망도 들을 만 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러지 않았다.
“와줬잖아.”
애매한 미소였다. 이와이즈미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딱딱한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멀리서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와이즈미의 손에서 내 손을 천천히 뺐다. 택시에 타기 전, 이와이즈미는 내게 “내일 봐.”라고 인사했다. 마치 어제도 한 인사처럼 평온하고 익숙했다. 택시 안에서 그 인사가 주는 위화감을 곱씹었다. 수없이 반복한 그 말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교를 하던 소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눈을 뜬 것은 이와이즈미의 집 소파에서였다. 그에게는 제법 크고 좋은 침대가 있었지만 도무지 그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알게 된다면 바보라고 한소리를 했을 것이다. 늦잠을 자버린 탓에 벌써 점심때가 스물스물 다가오고 있었다. 편의점에 잠시 나가 도시락을 사먹고 외출 준비를 했다. 곧 출발한다고 메시지를 넣는 일도 함께였다.
단정한 옷을 입고 조의금까지 챙겨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북적이지는 않아도 사람들이 꾸준히 어깨 옆을 스쳐지나갔다. 빈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전히 식사 중인 사람들을 지나쳐 긴 복도로 들어가자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맨 끝에 보이는 방에는 상주가 홀로 앉아있는지 별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안에 발을 들이자 시선이 뺨에 달라붙었다. 영정사진을 향해 상객의 예를 하고 상주에게 돌아섰다. 어젯밤 가로등 아래 보았던 얼굴이 지금은 훨씬 잘 보였다.
“바로 집에 갈 거지.”
형식적으로 맞잡은 손 위로 짤막한 물음이 던져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말이 이어졌다.
“챙겨둔 가방에 수첩 넣어놨어. 그거 한 번 읽어보고, 아이 돌보다가 모르는 거 생기면 전화 해. 알았지?”
“그럴게. 이와쨩은 언제 와?”
“집에 가는 건 내일. 늦을 거야. 저녁 먼저 먹어.”
자리를 벗어나기 전, 그를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려 돌아보았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상주의 역할로 돌아가 있었으며, 그의 뒤에는 아내의 영정사진이 자리했다. 혼자 두는 것이라고 말해야하는지, 마음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말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빠져나와서는 렌을 찾기 위해 친척으로 보이는 여자를 붙잡았다.
“렌은 어디 있나요?”
워낙 다짜고짜 물은 탓에 의심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설명했으나 사 년이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친구에게 네 살배기 어린 아이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와이즈미에게로 한 번 더 끌려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확인을 받아야했다. 이와이즈미는 조금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머쓱해 하는 나를 보며 “오죽했으면…….”하고 흐린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할지 전부 알 것 같은 한 마디였다. 별로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미리 말해놨어야 하는데, 미안하다.”정도의 사과는 받았다. 사람들에게 안내 받은 쪽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안에서 무언가를 달칵달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어눌하고 앳된 발음이 온전히 아이의 것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은 탓인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문 틈새로 누군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나는 일부러 문을 활짝 열며 밖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이를 돌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하면 불안감이 가시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문짝에 매달려 “렌쨩, 나 들어가도 될까요?”하고 물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렌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문을 닫고 렌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안에서 들리는 달칵달칵 소리는 렌의 장난감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이는 장난감 기차를 움켜쥔 채 바닥에 댔다가 떼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어른을 앞에 둔 것과는 다른 어색함이 느껴졌다.
“나 기억나요? 렌쨩이 애기일 때 만난 적 있는데.”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꺼내는 가장 재미없는 말을 하면서 애써 웃었다. 렌은 한참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렌은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였으니 기억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는 말수가 적었고 내가 하는 농담에도 한 번 헤 웃고 말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결국 꺼내는 말이라고는 네 아빠와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얼마만큼 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점 이야기가 바닥을 칠 쯤 나는 박수를 한 뼘 치고는 말했다.
“나는 토오루에요. 우리는 이름이 똑같을 뻔했어요.”
그러자 렌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눈을 깜박였다. 여태껏 내가 한 이야기 중 가장 반응이 좋았다. 이 이야기가 궁금하냐고 물었더니 렌은 검지를 들고 나를 가리켰다.
“알아요, 토오루.”
아빠에게 들었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정말 나를 기억하는 것인지, 지금부터 알게 되었다는 말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꽤나 쉬웠다. 렌은 내가 하는 말에 금방 귀를 기울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까르륵 웃었다. 나중에는 렌을 안아볼 수도 있었다. 양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남은 품에 아이를 안았다. 집에 갈 거라고 했더니 렌은 오묘한 얼굴을 했는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싫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이와이즈미의 집에 도착해서는, 렌에게 장난감을 쥐어주고 그 옆에서 수첩을 읽었다. 주로 밥을 어떻게 챙겨주면 되는지, 잠은 언제 자는지 등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할 텐데 이것도 꼼꼼하게 적는다고 신경 썼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했다. 아이를 돌보는 내내 이와이즈미에게 꼬박꼬박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은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어, 방금은 TV를 틀어줬어, 저녁을 먹였어, 시간이 돼서 재웠어.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을 때, 이와이즈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는 별 일 없었어?”
그 한 마디로 지금 통화하는 사람이 이와이즈미라는 것이 너무 생경하게 와 닿았다. 내게서 말이 없자 그는 “왜 또 말이 없어?”하고 조금 성급한 말투로 물었다. 렌의 이불을 꼼꼼하게 다시 덮어주며 방에서 나왔다. 기다란 소파에 누워서야 그의 말에 답했다.
“그냥 애기랑 놀았어.”
“하루 종일?”
“나 이렇게 조그마한 애랑 단 둘이 있는 거 처음이라 눈 돌리면 다칠까봐…….”
이와이즈미는 아주 낮은 소리로 웃었다. 쇠 긁는 소리가 밑바닥에 깔려있는 듯 했다. 아내가 죽은 뒤 이와이즈미는 울었을까? 울었다면 얼마나 울었을까?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운 후였을까? 어쩌면 전화를 끊은 후에 울었을까? 이런 저런 물음이 혀 위로 둥글게 자리했다. 입을 닫지 못한 채 아무 말이나 튀어나가지 않도록 애를 써야했다.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이와쨩, 많이 힘들어?”
핸드폰 너머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자 마치 눈앞에 서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아내는, 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계속 아팠어. 죽을 정도인줄은 몰랐지만.”
살짝 찌푸린 눈썹과 내리깐 눈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이 년 전에 이미 얼마 못 살 거라는 통보를 받아서 마음의 준비를…….”
숨을 삼켰다. 더 이상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도 이와이즈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아, 우리의 지난한 세월에 비하면 사 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지. 달리고 달려서 고작 이 자리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와이즈미 또한 그러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모든 것이 너무도 가엾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이와이즈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안방에 걸려있던 큼직한 결혼사진을 떼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종이에 싸서 장롱과 벽 사이에 밀어 넣었다. 집안 곳곳에는 사진액자가 놓여있었는데, 시간이 흐를 때마다 하나씩 장롱 뒤와 안으로 사라져갔다. 가장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은 사진은 아내와 아이가 함께 찍은 것이었는데, 봄이었는지 어깨 너머로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앞에 아내와 자신의 결혼반지를 나란히 내려놓은 채 먼지가 쌓이기를 기다렸다. 하루에 한 번, 한 쌍의 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가볍게 체육관으로 나가는 것이 어느 새 나의 일과가 되어있었다. 반대로 이와이즈미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를 마중 나온 렌을 안아들고는 사진 앞에 서는 일이 잦았다.
“렌,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뭐했어? 엄마한테 말해봐.”
아이는 이와이즈미의 품에 안긴 채 두 손을 쫙 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나열했는데 알맹이는 매번 비슷했다.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낮잠도 잔다. 이와이즈미는 매번 같은 말에 하나하나 대답해주고는 “잘했어.”하고 칭찬해줬다. 그는 안방으로 렌을 데리고 들어가서는 침대에 뉘였다. 내가 그의 집에 신세를 진 뒤로, 렌의 몫으로 사용하던 작은방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사진 앞에 선 채로 이와이즈미와 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렌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며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그러다보면 렌은 그 말에 답하다가 조금씩 잠에 빠져 들어갔다. 이와이즈미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피곤한 날도 애정을 감추지 못했다. 렌이 완전히 잠들어 새근거릴 때면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했다.
“렌쨩은 이와쨩을 많이 닮았어.”
항상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안방에서 나오던 이와이즈미가 의아한 눈으로 날 보았다. 렌은 이와이즈미를 많이 닮았다. 이를테면 못 먹는 반찬도 꾹 참고 먹거나 울고 싶을 때에 입술을 꼭 깨무는 모습이 꼭 어린 시절의 이와이즈미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긴 것만 그래.”하고 말했다.
“난 어릴 때 매일 다쳐서 들어올 만큼 정신없는 애였잖아.”
“이와쨩을 본 건 나야. 내가 더 잘 알아.”
말은 이와이즈미에게 건네고 있었으나 시선은 여전히 사진과 한 쌍의 반지를 향해 있었다. 반지에 먼지가 가득 쌓이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협탁의 모서리를 꽉 쥐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곤이 묻은 얼굴이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쨩, 나…….”
“말하지 마.”
목소리가 말의 틈을 찍어 누르는 듯 했다.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짚은 채 옅은 신음을 흘렸다.
“도쿄에 가겠다고 말하려는 거잖아.”
“날 잘 아는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헛숨을 뱉듯 웃었다. 이와이즈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카맣고 날카로운 눈 사이로 노기가 서렸다. 그 눈을 뒤로 한 채 “내일 갈 거야.”라고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직전, 이와이즈미가 문틈으로 손을 넣고는 열어젖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손을 저었으나 그런다고 물러갈 사람이 아니었다.
“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랑 사는 게 불편하다면 근처에 다른 방을 찾아보면 되잖아. 체육관이 마음이 안 들어? 아니, 변명 대지 마. 뭐가 문제인지 말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느껴졌다. 답을 숨긴 채 이와이즈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 모든 행동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얼굴이 가까웠다. 어째서일까. 순간 이곳의 사람들 중 오로지 나만이 가엾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이 까슬거렸다. 혀를 내어 하얗게 튼 자리를 핥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 안에 내가 담겨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내 가슴에 손을 대고 느리게 밀어냈다. 그늘 진 뺨이 잘게 떨렸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답을 들을 자신은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나를 밀어냈듯, 나 또한 그를 밀어냈다. 이와이즈미를 방밖으로 내보내고 이번에야말로 문을 닫았다.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 앞으로 떠나는 발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짐을 쌌다. 이와이즈미가 언제 자리를 벗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방의 지퍼를 닫을 때까지도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 앞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의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와이즈미는 다음 날 배웅을 나왔다. 렌도 함께였다. 이와이즈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나 역시 그에게 말을 걸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종종 렌에게만 이런저런 말을 걸며 떠들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렌은 내게 두 팔을 벌리며 뽀뽀를 해달라고 졸랐다. 아, 애교가 제법 있구나. 이런 점은 또 이와이즈미와 딴 판이었다. 어쩌면 집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있어 아이 스스로 익힌 것일 수도 있다. 렌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내 뺨을 톡톡 쳤다. 그러자 아이의 말랑한 입술이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기차가 도착할 쯤 손을 흔들었다. 여태 한 마디도 없던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전화하면 받아.”
답은 주지 않았다. 그도 어제 내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니 공평했다. 기차에 올라앉아, 이번에야말로 렌의 결혼식에나 미야기에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쿄로 돌아와 생활하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꾸준히 전화를 걸었다. 받지도 않는데 어찌나 규칙적이던지 전화가 오는 시간마저 저녁 전후로 비슷했다. 그것을 보며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쫓기는 도둑보다 감옥 안 죄수가 잠은 더 잘 오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농담이 늘었고, 사람도 자주 만났다. 한 달 동안 신경을 안 쓴 것에 비하면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누군가는 내게 여행이라도 다녀온 게 아니냐며 부러워했다.
그렇게 여유롭게 지내다가도 어쩌다 이와이즈미의 전화가 늦으면 초조해졌다. 저녁메뉴를 고르지도 못했고, 당연히 저녁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 한 시간 쯤 뒤에 전화가 울리면 그제야 숨통이 트이면서 다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이었다. 나는 이와이즈미의 전화가 일주일이면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를 넘겼고, 다음은 한 달을 예상했으나 그 또한 가뿐히 넘겼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와이즈미의 전화를 무시한지 세 달이 넘을 듯 했다.
내가 그 전화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인 어느 주말이었다. 다른 날과 달리 약속도 없어 가볍게 로드워킹을 한 후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잘 예정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잠에서 깨버렸다.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았다. 곧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바닥까지 늘어지는 숨을 뱉으며 더 이상 전화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준비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았을 때, 이와이즈미는 그런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넌 정말 끔찍한 녀석이야.”
다짜고짜 뱉어진 비난이 인사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지금 도쿄인데, 네가 어디 사는지 몰라. 나 좀 주워가라.”
낮은 목소리로 뭐가 좋은지 웃는다. 이건 분명 웃음소리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았다. 이와이즈미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주변 건물을 차례로 읊기 시작했다. 얼마나 귀신같은지 그 중에는 내가 다니는 체육관도 있었다. 그는 농담처럼 “저기 들어가서 작년에 나 몰래 은퇴한 오이카와 선수 집이 어디냐고 물어볼 거야. 너무 끈질겨서 스토커로 경찰에 끌려갈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것이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참고 참다 겨우 오늘이었던 것인데, 왜 그에게도 오늘이었을까.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몸은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겨울이 오고 있었기에 밖에서 하염없이 타인을 기다릴 날씨가 아니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갈수록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와이즈미가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닌데 그랬다. 그러는 사이 마음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꾸만 비틀거렸다. 그건 멀리서 이와이즈미를 발견했을 때도 여전해서, ‘차라리 이대로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체육관 앞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차츰 다가가자 오로지 내게만 시선을 주었다.
“우리는 꼭 밤에 다시 만나네. 얼굴이 안 보여.”
어울리지도 않는 엄살이었다. 날이 제법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사실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으면 어떤 얼굴일까 떠올랐다. 그저 그 속에 담긴 생각을 모를 뿐이다. 이와이즈미가 자기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은 채 한숨을 쉬었다.
“너무하네. 여기까지 오는데 세 달이나 걸렸어.”
“돌아가는 건 몇 시간이면 될 걸.”
시간이 흐를수록 날도 차가워졌다. 그에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채근했건만 들을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보였다. 급기야는 내게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뭉툭하게 잘린 손톱이나 굳은살이 배인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그 끝을 살며시 잡았다. 생각했던 대로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내게는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는 주제에 스스로에게는 요령이 없었다.
“너 데리러 온 거야.”
“난 안 가.”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의 아내와 렌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집에 가면 한낱 감정마저도 돌팔매를 당할 만큼 나쁜 것이 되곤 했다. 이와이즈미는 나를 그런 곳으로 데려가려하는 것이다. 너무도 끔찍했다. 손을 놓으려 하자 이와이즈미가 더 세게 잡아왔다.
“날 왜 데려가? 좋아하지 않잖아.”
“세상에서 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며 이와이즈미는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따져도 꼼짝을 안했다. 눈을 마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시야는 흐릿하고 머릿속에는 먼지 쌓여가던 한 쌍의 반지만 떠올랐다. 지금은 얼마나 쌓였을까. 반지가 보이지 않는 날은 평생 오지 않겠지.
“우린 불행할 거야.”
“아니야. 행복할 거야.”
확신에 찬 답이 원망스러웠다. 눈을 마주해도 그가 그려내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잔뜩 엉킨 실타래처럼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렌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네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울지 마.”
이와이즈미는 내 손을 당겨 눈가와 뺨을 닦아주었다.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약지 위로 입을 맞췄다. 손가락 사이로 옅은 숨이 닿아 도망가듯 손을 움츠렸다.
“언젠가 너나 나나 모든 걸 정리하면 반지도 사자.”
“그런 날이 안 오면?”
꼭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묻고 따졌다. 그런 날이 안 오면, 평생을 살아도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렌이 날 원망하면, 평생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가 불행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나와 달리 이와이즈미는 겁내지 않았다.
“난 어려울 것 같지가 않아. 그러니 우리 집에 가자.”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굽혀 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와이즈미는 내 뺨과 귀를, 머리카락과 뒷목을 느리게 쓰다듬다가 등을 한껏 수그려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날이 춥네.”하고 속삭였다. 안도와 닮은 웃음이 섞여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내가 늘 같은 자리에 있어도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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