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카게스가 데이~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
“있잖아.”
소파에 가만히 기대어 TV를 보던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그는 아까부터 자기 팔이며 배, 허벅지와 종아리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근육이 뭉칠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던 참이었다. 스가와라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는데, 꼭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막상 꺼낸 말은 좀 다른 부류의 것이었다.
“나 좀 늙은 것 같지 않아?”
물론, 개개인에게는 우주의 탄생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스가와라는 자기 다리를 쭉 펴면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이거 봐. 어릴 때는 그래도 근육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어. 폐허야.”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 배를 훌렁 까놓고 손바닥으로 배꼽 위를 문질렀다. 혼자 놀라더니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배 위에 올려놓고 “진짜 아무 것도 없지?”하고 묻는다. 카게야마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스가와라의 배를 둥그렇게 문질렀다. 그의 진지한 이야기에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 카게야마는 눈을 수없이 깜박이며 손바닥 아래의 말랑한 살에 집중했다.
“말랑하다는 건 좋은 거예요.”
“말랑해? 살 쪘어?”
“아니, 그게 아니라…….”
스가와라는 한숨을 길게 내쉰 채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옷을 도로 내려준 뒤에 “스가와라 씨?”하고 한 번 불렀지만 상심으로 가득 찬 웅얼거림만 돌아올 뿐이었다. 분명 말랑하기는 했지만 스가와라는 살이 쪘다기보다는 마른 쪽에 가까웠다. 밥을 많이 먹는 편도 아니거니와 간식을 챙겨먹는 일도 드물어서 살이 잘 붙지 않았다. 몇 년 전에는 근육을 만들려고 해도 몸에 살 자체가 없어 한참 고생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스가와라는 있지도 않은 뱃살을 만지느라 자기 가죽을 꼬집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스가와라 씨는 말랐어요.”라고 말했다. 거짓말도 아니었는데 스가와라는 눈을 슬그머니 뜨며 “정말?”하고 물었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니 혀를 살짝 내밀어 웃는다. 늙기는 무슨, 꼭 열다섯 살짜리 여자애 같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해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 날 저녁은 야채가 아주 많이 들어간 카레였다. 뭐, 분명 맛있었다.
그 때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지만 스가와라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는 뜬금없이 건강 프로에서 채널을 멈추며 “어디에는 무슨 음식이 좋대.”라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젊어지기 위해서라는데 그 자체가 이미 틀려먹은 것 같다. 카게야마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건강해질 거예요. 고기 먹으러 갈까요?” 같은 말로 스가와라를 달래고는 했다.
스가와라의 관심사가 이토록 젊음과 건강에 쏠린 것은 얼마 전 고교배구를 보고 온 후부터였다. 그들은 카게야마가 졸업한 후 한 3년간은 고교배구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보니 카게야마가 활동하고 있는 프로팀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그러다 올해 카라스노 배구부가 제법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고 조금씩 찾아보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이 까만 유니폼을 입고 코트 위에 서있는 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란다. 경기를 보는 내내 스가와라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합은 2-1로 카라스노의 승리였다. 기쁜 얼굴로 코트를 내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스가와라가 중얼거린 말은 “부러워.”였다.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무엇이 부러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찬란한 눈은 카게야마에게도 두고두고 그리운 것이었다. 그 뒤로 스가와라는 종종 자기가 늙은 것 같지 않냐며 장난스럽게 묻고는 했다.
한 쪽이 건강에 관심을 가지니 다른 한 쪽도 신경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밤 산책을 자주 나가게 되었다. 짧게 로드워킹을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설렁설렁 걸으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주고받고, 옛날 일을 추억하는 시간을 보냈다. 분명 즐거웠으나 일이 바쁜 날은 그마저도 피곤한 일정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스가와라는 베개에 코를 박고 피곤하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너무 늙어서 시작하자마자 곯아떨어지면 어떡해?”
이미 스가와라가 누워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다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개에 머리를 완전히 대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아니, 보통 그런…… 그런 날은 안 해요!”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래에서 스가와라가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루 이틀 한 집에 산 것도 아닌데 이런 농담에 허둥대는 애인이 귀여운 눈치였다. 카게야마가 도로 침대에 눕자, 스가와라는 그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루 이틀은 귀엽게 봐주겠지만, 매일 그러면 역시 지겹겠지? 어느 날 카게야마가 젊고 탱탱한 남자를 데리고 오는 거야. 스가와라 씨, 인사하세요. 제 새 애인이에요. 매일 해도 지치지 않는답니다.”
애써 카게야마의 목소리까지 따라하는 통에 웃음이 터졌다. 카게야마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스가와라도 자기 하는 꼴이 웃긴 지 한참이나 전부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스가와라를 달랬다.
“보통 그런 식의 고민은 제가 하는 거예요. 그보다 이런 얘기 너무 중년부부 같아요. 앗, 늙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카게야마의 어깨로 스가와라의 숨이 닿았다. 불도 다 꺼진 방에서 웃음소리만 자꾸 삐죽삐죽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시 해가 뜨고, 엉성하게 쳐 둔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눈에 힘을 꽉 주어 닫았다가 천천히 떴다. 요즘 들어 스가와라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아침이었다. 일을 나가야하는 것도 싫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전부 싫단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니 그나마 덜 싫을 지도 모르겠다. 카게야마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얼굴 위로 햇살이 찰랑찰랑 넘쳤다. 손가락을 모아 스가와라의 눈 위로 살짝 띄웠다. 알게 모르게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전보다 편해보였다. 카게야마는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스가와라의 감긴 눈과 살짝 다물린 입,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던 눈 아래 점을 살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부러워할 거 하나 없는데.”
스가와라는 자기가 하도 투정을 부리니 카게야마가 빈말로 달래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런 말에 능숙해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스가와라는 옛날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분명 얼굴에 앳된 기색이 사라지고, 예전만큼 달릴 수 없고, 그때와 다른 것을 고민하기는 한다. 그러나 열아홉, 그때 품었던 찬란과 설렘은 한 조각도 잃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일으켜 커튼을 꼼꼼히 정리했다. 다시 스가와라의 곁에 누워 그에게 자신 또한 여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바람은 그리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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