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둘리전 Marriage in New York에 참가한 글입니다.
너무나도 예쁜 책에 함께 할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s2
* 두 사람이 이별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온가족이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연락도 없이 찾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인터폰을 통해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푸르스름한 화면 너머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누군데?”
이와이즈미가 인터폰 앞에서 망설이는 동안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그는 화면을 끄고 “오이카와요.”하고 말했다. 다소 놀라는 어머니의 반응을 뒤로 한 채로, 현관문으로 다가섰다. 분명 아직 이 앞에 있을 텐데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오이카와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어있는 어깨와 그 어깨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희고 작은 개였다.
“아, 안녕.”
오이카와가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개도 꼬리를 흔들며 작게 멍 하고 짖었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문고리를 쥔 채로 개와 오이카와를 번갈아보았다. 이와이즈미에게서 아무 말도 없자 오이카와는 당황한 얼굴로 뺨을 떨었다.
“음, 저기…….”
본래는 오이카와가 인사 외의 첫마디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하다못해 그것이 날씨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멀쩡한 개만 어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현관등의 주황색 불빛 탓인지 낯빛까지 퀭해보여서 이쪽에서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모모는 왜 데리고 왔어?”
모모는 오이카와가 안고 있는 그 개의 이름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와이즈미도 그 개와 함께 거실 바닥을 굴러다녔더랬다. 모모는 몇 달 만에 만난 이와이즈미가 반가운지 꼬리를 점점 힘차게 흔들었다.
“모모 좀 맡아줘.”
몇 달 만에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안부나 자질구레한 사정 설명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게 오이카와답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 순간에 개가 오이카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못 본 사이 더 묵직해진 개가 다리에 매달려 안아 달라 조르는 동안 오이카와의 시선도 바닥을 향해 있었다.
“경기 때문에 곧 해외로 나가야하는데, 마땅히 맡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왔어.”
이건 아마 거짓말일 터였다. 둘이 여행을 갈 때면 애견호텔에 맡기거나 모모를 유난히 예뻐하는 마츠카와에게 부탁하고는 했었다. 적어도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집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오이카와도 자기 말이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이와이즈미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래서…….”
오이카와는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처럼 이마를 손끝으로 훑어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와이즈미는 그때 처음으로 오이카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고작 개를 맡아달라고 찾아왔을 뿐인데, 거절한다면 이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두 팔을 뻗어 모모를 들어올렸다. 모모는 익숙하게 이와이즈미의 품에 안겨 그의 뺨을 핥아댔다. 이와이즈미는 모모의 얼굴을 조금 떼어내며 “알았어.”하고 답했다. 그러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웃었다. 그 미소를 본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오이카와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마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모모 짐은 어디 있어?”
“차에. 내가 가져올게.”
오이카와는 태평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차로 향하는 발걸음부터 영 시원치가 않았다. 저렇게 딱딱하게 걷다 넘어지면 크게 다치지.
“모모야, 쟤는 진짜 바보야.”
오이카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하긴, 누가 누구더러 바보라고 하겠어. 이와이즈미는 모모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한숨을 쉬었다.
모모의 이름은 그 단순함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와이즈미가 지은 이름이었다. 모모는 정말 뜬금없이 이와이즈미의 삶에 끼어들었다. 이와이즈미의 인생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대개 오이카와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모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여름날, 오이카와는 아주 작고 하얀 개를 데리고 두 사람의 집으로 왔다. 반팔에 반바지만 입고서도 더워 죽으려는 마당에 그 뜨뜻한 개까지 안고 현관에 서있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친구가 바빠서 잠깐 맡긴 거지?”
이와이즈미는 다 알면서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품에 콩알만한 개를 안겨주며 깔깔거렸다.
“다 알면서 왜 그래?”
오이카와는 개를 데려오는 건 자기가 했으니 이름만큼은 이와이즈미가 지어야한다고 안달을 냈다. 이와이즈미는 개를 원래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 주고오라며 고개만 저어댔다. 그러나 저녁 무렵까지 눈앞에서 아양을 떠는 작은 강아지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털뭉치에게 재롱을 부리는 오이카와를 보는 쪽이 더 즐거웠을 것이다. 그 당시 이와이즈미는 복숭아를 먹고 있었고 그랬기에 “모모라고 하자.”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정색을 하며 그런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모모? 윗집 개도 아랫집 개도 모모잖아! 얘는 분홍색도 아닌데!”
“하얀 게 문제냐?”
“문제지! 우리 애는 털이 하얗잖아!”
언제부터 우리 애가 된 거야. 이와이즈미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럼 눈에 관련된 걸로 하던가. 예를 들면…….”하고 말했고 오이카와는 아주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역시 모모라고 하자. 그게 낫겠어.”
그러고도 오이카와는 개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했다. 그래놓고 며칠이 지난 후에는 이와이즈미를 불러 앉혀다가 모모의 이름을 불렀다. 모모는 잘 세워지지도 않는 귀를 쫑긋거리며 오이카와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오이카와는 신기하다는 듯이 “봤어? 봤어?”하고 요란을 떨었다.
“이름이 쉬워서 그런가, 금방 알아듣는 거 있지.”
“내가 잘 지었지?”
그 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도 금방 웃어버렸다.
본래도 조용할 날이 없는 집이었지만 모모가 온 뒤로는 더 그랬다. 매 끼니마다 소란이 이는 건 당연했고, 모모가 아파보이면 조심조심 안고 병원까지 뛰느라 사색이 되기도 했다. 단둘이 간 여행에서도 하루만에 “집에 가고 싶은 건 아닌데, 모모는 보고 싶어.”라는 대화를 나눴으니 오죽하겠는가.
모모는 사랑스러운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가장 활약할 때는 두 사람이 다퉜을 때였다. 집안에 흐르는 엷은 냉기는 모모가 거실에서 다소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풀렸다. 한 번은 크게 다퉈 오이카와가 집을 나간 적이 있는데, 다시는 안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서는 반나절 만에 돌아와 모모를 끌어안았다. 화가 완전히 풀린 채로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집안에 앉아있으면 화해할 건수가 생기는 법이었다.
“이와쨩, 애 때문에 이혼 못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 지 알아?”
때때로 오이카와는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다.
“맞아, 나는 모모 때문에 너랑 사는 거야.”
이와이즈미가 그렇게 답하면 오이카와는 혀를 샐쭉 내밀고서는 “나도거든?”하고 맞받아쳤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모가 그들 관계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와이즈미가 이별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오이카와의 첫 열애설이 터진 것은 신인선수로 활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오이카와는 소식을 듣자마자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와서 해명하려고 들었지만, 이와이즈미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 학생 때도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TV를 제대로 타면 얼굴 얘기가 안 나올 수 없겠지. 남들 앞에서는 한껏 가벼운 척을 하는 녀석이니 언제가 되었든 이런 루머에 한 번쯤은 엮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이다.
이와이즈미는 회사에서 듣는 온갖 헛소리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인터넷 기사에 질려갔지만 어쩌다 그런 속내가 튀어나가면 오이카와가 어쩔 줄을 몰라했기에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열애는 개뿔, 어제도 내 팔 베고 잤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나아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다행히 상대와 오이카와 둘 모두 빠르게 부인기사를 낸 탓에 헛소문은 차차 사그라졌다.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도 그런 건 우스갯소리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도 열애기사가 터졌다. 이번에도 별 것 아니라 여기기에는 상대가 꽤나 나빴다. 소속사가 노이즈 마케팅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곳이었기에 부인 기사를 낸 오이카와와 달리 애매한 말로 둘러대며 일을 크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한창 경기 중이었고,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앞에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미안하다고만 했다. 다소 쳐진 어깨와 좋지 않은 안색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한숨처럼 웃었다.
“나 이 일로 네 사과 받는 거 싫어. 안했으면 좋겠어.”
“응, 미……. 아니, 음.”
오이카와는 사과를 목구멍 깊숙하게 삼키며 말을 골랐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이와이즈미는 그 말을 반만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 일방적으로 오이카와를 좋아하더라도 알아서 선을 그으리라는 것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속담과는 달리 아니 뗀 굴뚝에서도 연기가 났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이와이즈미는 믿지 못했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뜻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아마 거기서부터 잘못되었을 것이다. 존중이 때로는 해가 되기도 한다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열애설이 터졌을 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숙인 채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가십을 몰고 다니는 남자지. 학창시절부터 언제나 그래왔다. 옆 반의 누구랑 사귄다더라, 3학년 선배가 고백을 했다더라. 그런 말들이 수없이 이와이즈미의 귀에 들어왔었다. 그때는 오이카와와 친구였을 뿐이었던 지라, 소문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긴 했지만 오이카와의 기운 빠진 사과를 들을 일도 없었다. 그래, 그거 하나는 정말 좋았지. 그때는 이런 생각할 여유도 없었지만.
오이카와가 돌아온 것은 꽤나 늦은 밤이었다. 열애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팀 동료라거나 감독 같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겠지. 오이카와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이와이즈미 앞에 섰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거밖에 없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도 이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의 탓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온몸이 그림자로 꽉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이와이즈미가 할 수 있는 답도 그 정도뿐이었다.
다음 날, 이와이즈미는 작은 짐을 꾸렸다. 이사를 간다기에는 터무니없이 작고, 여행을 간다기에는 다소 큰 크기의 짐이었다. 짐을 싸는 동안 모모가 쉼 없이 주변을 돌며 방해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짐 싸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와이즈미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달려 나왔다.
“이와쨩.”
오이카와는 맨발로 현관을 딛고 서있었다.
“나를 못 믿어서 가는 거야?”
이와이즈미는 흐리게 웃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그 순간의 오이카와는 두 눈에 안도와 절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그대로 문을 닫고 그 집을 나섰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별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지만 어째서인지 그 길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길은 모두 무너지고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이 가느다란 길만 눈에 보였다. 장님처럼 발밑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모는 잘 지내?”
뜬금없이 전화를 건 오이카와가 건넨 말은 그거였다. 이와이즈미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한 채로 전화를 받은 것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그는 자신의 배 위에서 잠든 모모의 등을 쓰다듬으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내.”
“어디 아프진 않고?”
“응, 건강해.”
“사고는 안 쳤어?”
“응.”
핸드폰 너머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는 사람보다는 건 사람이 더 긴장되기야 하겠지. 잠깐의 침묵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그럼 끊을게.”하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와이즈미는 통화가 끊긴 액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침대 옆에 뒤집어놓았다. 그날은 좀처럼 깊게 잠들 수 없었다.
문제는 오이카와의 전화가 그날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밤마다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를 걸어 모모의 안부를 물었다. 질문의 레퍼토리도 매일 밤 같았다. 잘 지내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사고는 안쳤는지. 그러니 이와이즈미의 답도 매번 같을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내고, 아프지 않고, 사고도 치지 않았다고. 그러고 나면 곧 통화가 끊어졌다. 1분도 되지 않는 통화를 마치고 나면 가슴이 답답했다.
“너 말이야. 시합은 잘 하고 있는 거야?”
며칠 째 얕은 잠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개운한 아침이 그리워지는 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전화를 끊기 직전에 말을 걸었다. 오이카와는 잠깐 대답이 없다가 조금 튀는 듯한 목소리로 “응.”하고 대꾸했다.
“잘 하고 있어. 정말로.”
억지로 차분하게 누르는 목소리는 개운한 아침을 선사하지 못할 듯 했다. 이와이즈미는 더 갑갑해진 마음을 안고 전화를 끊었다.
그 날 밤은 그대로 잠드는 대신 오이카와의 경기를 찾아보았다. 헤어진 이후로는 일부러 소식을 찾지 않으려고 했으니 오이카와가 코트 위로 공을 던지고 도약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한 코트 위의 선수들과 노련하게 호흡을 맞추고, 때로는 강단 있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모습이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정말 잘하고 있네.”
근원 모를 서운함이 치밀어 오르던 그때였다. 코트를 넓게 비추던 화면에 오이카와가 가득 찼다. 그는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카메라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찰나의 얼굴이 주인 잃은 개처럼 마냥 처량했다. 그것도 잠시, 오이카와는 다시 정면을 보며 두 손으로 자기 뺨을 몇 번 두드리며 시합에 집중했다.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보내오던 수많은 언어를 모른 척 했는데, 어째서 그 짧은 순간의 표정만큼은 외면하기 힘들었을까.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경기를 생방송으로 시청했다. 시차 때문에 조금 애매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를 모른 채 보는 오이카와의 경기는 언제나 그러했듯 흥미진진했고, 동시에 이와이즈미가 알던 오이카와 그 자체여서 안도감을 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시합이 끝난 후에 오이카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의 “여보세요?”는 너무 다급해서 우스울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웃음을 참고 “나야.”하고 답했다.
“모모는 잘 지내.”
“아, 응.”
“밥도 잘 먹고, 사고도 열심히 치고 있어. 어제는 화장실 휴지를 다 뜯어놔서 나한테 혼났어. 다 혼내고 나니까 시무룩해져서는 현관에 가서 앉아있더라.”
오이카와는 조금 넋이 나간 목소리로 “그렇구나.”하고 답했다. 이와이즈미는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매일 그러고 있어. 네가 많이 보고 싶은 가봐. 내가 네 시합을 볼 때마다 옆에 오거든. 그냥 배구 화면이 익숙한 걸 수도 있겠지만.”
“내 시합 봤어?”
“응, 봤어. 잘하고 있던데. 거짓말 아니더라고.”
오늘도 핸드폰 너머로 오이카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전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마저도 하나의 맥락처럼 여겨졌다. 이와이즈미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이카와, 나도 너 보고 싶어.”
크게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와이즈미 또한 긴장으로 혀끝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너만 괜찮으면 모모랑 같이 먼저 가서 기다릴게.”
“집, 집에?”
“싫어?”
“안 싫…….”
오이카와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멈췄다. 이와이즈미는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걱정스럽게 “울어?”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목소리는 물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이와쨩, 나…… 미안해. 이건 열애설에 대한 사과가 아니야.”
비록 당장이라도 목 막힌 소리를 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심지 굳은 데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응.”하고 오이카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나를 믿어줄 거라는 걸 완전히 믿지 못했어. 세 번이나 되면 이와쨩도 맘 속 어딘가에서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그 말을 듣는데 코가 찡하게 아렸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콧잔등을 문지르며 웃었다.
“나도 사과할 일이 많아. 그러니까 얼른 이기고 돌아와.”
“다음 경기도 봐줄 거야?”
“응, 꼭 볼게.”
“그럼 꼭 이길게. 집에서 기다려야해, 알았지?”
“그래.”
이와이즈미는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짐을 쌌다. 올 때는 짐이 한없이 작았는데, 다시 가려니 짐이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거기에 모모의 짐까지 더해져 챙기기 벅찰 정도였다. 다소 큰 짐은 다음에 다시 옮기기로 하고,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 둘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오이카와 혼자 살던 집은 한없이 냉랭하고 외로웠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살피며 그 위에 챙겨온 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모모는 집으로 돌아온 게 마냥 좋은지 꼬리를 흔들며 이와이즈미의 다리에 옆구리를 비볐다.
“오이카와는 아직 안 와. 좀 더 참아.”
이와이즈미는 모모를 안아 올리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신발을 벗자마자 바로 정리에 들어갔는데도 아직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어수선한 쪽에 가까웠다. 갈 길이 참 멀었다. 오이카와가 오면 사과부터 해야지.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거야. 그리고 믿음을 주지 못한 건 내 잘못도 있다고 말해줘야지.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당장에라도 오이카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만이 남아있던 자리에 수많은 말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꽃다발 사놔야겠다. 그치?”
이와이즈미는 모모에게 묻고서는 다시 짐정리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분주히 움직이면 오이카와가 돌아올 쯤에는 둘이 살던 그때처럼 그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식탁에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고 꽃다발을 건네주면 오이카와는 활짝 웃어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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