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브캐 등장, 사망소재, 포스트 아포칼립스.
남자는 자기를 이와이즈미라고 말했다. 그랬기에 나는 그를 이와이즈미라고 불렀다.
남자는 동쪽에서부터 걸어왔다. 건물도 폭삭 내려앉고 나침반 하나 없는 내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해가 뜨는 모양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배가 너무 고파서 저 사람이 가까이 오면 뜯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게 얼마만의 사람인가 싶어 눈물이 날 것도 했다. 온갖 생각에 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한 걸음 걷는 것도 벅찬 나와 달리 남자는 두 발로 성히 걸었고 비교적 몸도 건강해보였다. 그는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나를 빤히 보았다. 역광에 비친 낯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나와 같을 지도 모른다. 잡아먹고 싶다거나, 대화를 하고 싶다거나……. 남자는 한참이나 걸음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굳은 모래덩어리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열 걸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눈을 몇 번이나 깊게 감았다가 뜨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해가 남자의 등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뒤통수로 차츰 자리를 옮겼다.
남자가 내게 다가왔을 쯤에는 남자의 낯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림자 한 점 묻지 않은 하얀 얼굴이 너무도 이상해보였다. 마치 이 지독한 멸망마저 그를 버려둔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물 좀 마실래요?”
안부를 묻는 것처럼 사근사근한 말씨였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플라스틱 병을 꺼내 내 입에 대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입술과 혀를 적시며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처음에는 분명 약간의 경계심이 남아있었을 진데, 오랜 갈증이 해소되는 순간에는 모든 걸 잊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병 하나를 완전히 비우는 동안에도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병을 한껏 기울여 마지막 물방울 하나까지도 내게 주었다. 물이 목구멍을 타고 달아날까 무서운 사람처럼 입을 가린 채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뱉었다. 남자는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내가 숨 고르는 걸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남자는 병을 건네받으며 웃어보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걸 빤히 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요.”
“뭐를요?”
“사람이 웃는 걸요.”
내 말에 남자는 한 번 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서야 남자의 머리카락이나 어깨, 무릎에 달라붙은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해가 뜨는 저 편에서 이곳으로 걸어온 것이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나요?”하고 물었다.
“나밖에 없어요. 사람을 본 게 며칠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남자는 짧게 탄식을 뱉었다. 그는 내 옆자리에 털썩 앉더니 물을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는 지도를 내게서 아주 가까운 곳에 펼쳐놓았다. 지도를 보는 순간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건 세상이 가루가 되기 이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길이 있고, 건물이 있었다. 남자는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가본 적 있어요?”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대피소가 있었다. 만일 그가 내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목구멍에 치미는 황당함을 감추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대피소는 예고도 없이 무너졌고, 간신히 살아남아 걸어온 길에도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무너졌을 거예요.”
“직접 가보진 않은 거죠?”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물자가 남아있을 리 없어요.”
남자는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그런가요.”하고 답했다.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고, 그건 희망에 가까운 모습을 띄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본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그 남자의 희미하고 처연한 미소가 아름답게 여겨졌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해가 다 지도록 남자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방 속에서 음식을 꺼내 내게 내밀기도 했다. 갈증이 해소된 탓이었는지 음식을 받기 전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물을 여유가 있었다. 남자는 푸스스 웃으며 내 손에 음식을 꼭 쥐어주었다.
“나랑 대피소에 찾아가보지 않을래요?”
내게 주어진 한 점의 음식과 누군가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간다면 대피소를 찾지는 못해도 목은 축일 수 있으리라는 이기적인 확신이 들었다. 헛수고일 거라는 말 대신 음식을 아주 조금씩 베어 먹었고, 그러는 동안 남자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사진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손끝으로 사진의 어느 부분을 하염없이 문지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이름은 이와이즈미 하지메에요.”
마지막 음식 조각을 목구멍 뒤로 넘기면서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남자를 따라 일어섰다. 우리는 꽤 오래 걸었다. 낮과 밤 사이를 꾸준히 걸었고 너무 덥거나 추워지면 조금씩 쉬었다. 그는 체온을 적당하게 유지하는 일에 능숙했고, 내가 너무 지쳐할 때마다 약간의 물과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걷고 있는 지도 모르겠더니 조금씩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시야가 트인 것이었다. 내가 남자의 그림자만 따라 걷는 동안 그는 나침반과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지도를 살폈다. 목적지를 가지고 걷는 일이 얼마만이던가? 그러나 남자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인 듯 했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요?”
“네, 걱정 돼요?”
“나침반이랑 지도로 길을 찾아본 적이 없어서…….”
그러자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그렇죠? 저도 원래는 몰랐어요. 아, 가르쳐 줄까요? 별 건 아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남자는 나침반을 내게 쥐어주었다. 그는 내가 어린 시절 배웠을 희미한 상식을 하나하나 되새겨주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요령도 덧붙였다. 그는 말을 조리 있게 하는 편이어서 뭘 말하더라도 이해하기 쉬웠다. 그는 내게 지도를 넘겨주며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지도에는 건물이 많았지만 실제로 보이는 건 잔해 정도에 불과했다. 어쩌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간판을 보며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도움 받는 처지에 미안하지만, 여기가 멀쩡하다고 해도 제대로 된 지원은 못 받을 거예요. 차라리 당신 가방에 있는 물건을 지키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런가요?”
남자는 내 말을 듣고도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의 그가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을 떠올려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찾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 순간, 꿋꿋했던 남자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그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요.”
구름이 한차례 몰려와 남자의 얼굴 위로 천천히 그늘이 졌다. 서서히 우리를 옥죄던 해가 뒤로 밀려났다. 남자는 하늘을 보더니 “조금 더 걸을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몹시 덤덤한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과 음식을 주지 않을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같았다. 꾸준히 지도를 확인하고, 틈마다 내게 물과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쉴 때면 내 몸을 살피며 좀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도록 도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 밤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이 남자라면 알 것도 같았지만 무언가를 물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진 건물 앞에 선 채 지평선 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래가 뺨을 할퀴어도 눈 한 번 깜박이질 않는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너진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는 “여기에서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내게 가방을 넘겼다.
“내가 달아나면 어떡하려고 이걸 맡기죠?”
남자는 나를 빤히 보더니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가지고 들어갔다가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죠.”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들고 달아날 수가 없었다. 남자는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도 폐허를 뒤지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남아 그와 했던 일들을 반복했다. 지도로 우리의 위치를 짚어보고, 너무 춥지 않게, 너무 덥지 않게 나를 지켜내는 일들 말이다.
남자가 돌아온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난 후였다. 그는 머리카락과 흰 뺨에 모래를 잔뜩 묻힌 채 나타났다. 모래 속에 웅크려 있다가 남자를 마중하자, 그는 내가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음. 계단이 아직 쓸 만해서 내려가 봤는데 아무도 없네요.”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가방을 되돌려주자 남자는 그걸 꼭 끌어안았다. 나를 만나기 전보다 가방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다시 지도를 펼쳤다.
“나는 다음 대피소로 갈 거예요. 당신도 갈래요?”
“다음이요?”
황당해하는 날 보고도 남자는 꿋꿋하기만 했다. 그가 절망할 것이라 믿었던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언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남자는 가방을 정리하며 내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옆에서 뭐라고 하는 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나는 그걸 받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당신 이름을 듣고, 참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는 음식을 씹다가 “지금은요?”하고 물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그러자 남자는 활짝 웃었다. 눈이 물길처럼 부드럽게 휘었고 그 틈새로 빛이 스며들었다. 찰나의 그는 또 다시,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참을 걸었다. 이번에는 내가 지도를 들고, 남자가 나침반을 들었다. 그는 태생이 건강한 사람인 듯 몇 시간을 내리 걸어도 지치는 법이 없었지만 가끔씩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는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방을 대신 들어주었고, 그는 내 그림자를 밟으며 어떤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몇 번의 대피소, 몇 번의 폐허를 건너는 동안 우리는 고작 한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우리를 따라 나서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남자는 그의 곁에 어느 정도의 음식과 물을 남겨주며 말했다.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에요.”
나도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건 너무나도 평범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을 건네는 사람처럼 결연해보였다. 내게 이름을 말해줄 때도 저런 얼굴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그마저 모래에 쓸려 내려간 듯 희미했다.
얼마 후에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가방은 더더욱 가벼워져 있었다.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났더라면, 또 건물의 잔재에서 만난 사람을 무시했더라면 저것보다는 넉넉했을 것이다.
“나라면 그때 날 구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남자가 내게 담요를 건네주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앞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하고야 말았을 말이기도 했다. 남자는 담요를 내게 떠넘기며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어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했잖아요. 이와이즈미, 당신이 나를…….”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거리며 “맞아, 그랬죠.”하고 답했다. 그는 담요를 몸에 두른 채로 자리를 잡았다. 해가 거의 넘어가기 전이었고, 그의 뺨은 그늘 탓에 창백하게 보였다. 순간 아주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남자가 실은 이와이즈미가 아니라는 생각. 모래 위에 똬리를 튼 저 남자가 몹시도 낯설게 여겨졌다.
그 날은 잠에서 몇 번씩이나 깨어났다. 단언컨대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꼭 잠자리가 바뀐 사람처럼 깊게 잠들 수 없었다. 그건 평화로운 시기에나 느꼈던 너무도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눈을 뜰 때마다 내가 본 것은 얄궂게 쏟아지는 별들과 남자의 옆모습이었다. 그는 잘 보이지도 않을 사진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렇게 하면 사진 안으로 손을 넣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이와이즈미.”
나는 그를 조그마한 소리로 불렀다. 그는 어깨를 감싼 채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거죠?”
그는 별을 등진 채 말이 없었다. 나는 오래 생각해왔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확신한 것을 입에 담았다.
“그 사람 이름이 이와이즈미인가요?”
남자는 자기가 쥐고 있던 사진을 품에 넣었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모래를 짚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나는 이렇듯 바닥에 무너져 있었고, 그는 내게 다가와 속삭였었다.
“난 이와이즈미에요. 내가 그 애 대신 살고 있으니까.”
남자는 내 어깨에 묻은 모래를 다정하게 털어주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자장가라도 불러줄까요?”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가 도로 눈을 감을 때까지도 여전히 눕지 않은 채였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혼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기이할 정도로 바람이 불지 않았고 모래 또한 잔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아서 원래부터 이곳에 나 혼자였던 것처럼 여겨졌다. 내 옆에는 그가 늘 메고 다니던 가방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그걸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안에는 음식과 물, 지도와 나침반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사용하던 담요까지도. 그의 물건 중 사라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사진 한 장뿐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남긴 것들을 모두 어깨에 짊어졌다. 가장 무거운 것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담긴 우직하고 다정한 행동들이 가장 무거웠다. 남자는 내가 그것을 온전히 기억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와이즈미라는 이름이 이 지옥에서 살아남도록……. 너무도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조금 웃었고 곧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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