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소설본 「무언극」 완매
서로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평행세계에서 이미 연인이 된 서로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
“이렇게 앓다가 죽진 않겠지?”
왜 그렇게 애처롭게 부르나 싶었는데 꼭 불쌍한 말을 한다. 이와이즈미는 조금씩 트이는 시야 사이로 오이카와를 살폈으나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안 죽어. 요새 감기가 많이 독하대. 그래서 그래.”
이마로 손을 뻗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에 걸렸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아직도 많이 아프냐?”하고 물었다. 너무 당연한 걸 묻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주변이 없어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바보 되면 어쩌지? 열 너무 심하게 나면…….”
“그건 애기들 얘기고. 넌 고등학생이야.”
“혹시 모르잖아. 그럼 나는 배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돈도 못 벌어서 굶어 죽고말거야.”
너무 허탈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힘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등을 뺨에 가져다댔다.
“그럼 내가 데리고 살아줄게.”
꼭 유치원 다니는 애들끼리 개나리 꺾어놓고 하는 프로포즈 같았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오이카와가 “정말?”하고 물을 때마다 “그래.”라고 순순히 대답한 것도 ‘그야 그런 때가 오면 그렇겠지.’라고 거짓 없이 생각한 까닭이었다. 오이카와는 답을 듣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다시 잠들었다. 아까와 달리 숨소리가 골랐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잠든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캄캄한 허공을 응시했다.
다음 날 오이카와는 방학 중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병문안을 가려고 전화를 했더니 곧 퇴원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그랬지. 고작 하루였다. 그런데 꼭 나흘은 되는 것처럼 심심했다. 틈날 때마다 살필 사람이 없으니 자꾸만 넋이 나가 잔소리를 들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늘 오이카와와 걷던 하굣길이 참으로 허전했다.
문득 걸음을 멈춰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집이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을 보며 전화를 해볼까 생각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창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 묶인 커튼이 꼬랑지만 겨우 빠져나와 펄럭이고 그 틈새로 오이카와의 얼굴이 불쑥 빠져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 푹 쉬었다고 얼굴이 말갛게 갰다. 그 또한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는지 놀란 얼굴을 하고서는 팔을 크게 흔들었다.
“이와쨩!”
목소리도 확실히 깨끗해졌다. 그는 어찌나 신났던지 꼭 주인 만난 개처럼 방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와이즈미는 그를 따라 손을 흔들어주며 오이카와의 집 울타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 오이카와의 웃고 있는 얼굴이 조금이나마 더 잘 보였다. 하루 종일 떠올린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문득, “좋아해.”라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지금이라면. 하지만 터져 나오려던 고백은 금방 목구멍 아래로 숨어들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이런 우연한 만남에 기뻐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평생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이와이즈미는 결국 “몸은 괜찮아?” 따위의 말을 꺼내야했고, 오이카와는 손 젓는 것을 거두며 “응, 훨씬 나아졌어.”라는 답을 했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꽤나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건넬 때면 목 아프게 소리를 쳐야했지만 울타리를 넘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와이즈미는 종종 그 날에 대해서 떠올리고는 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서로의 마음은 손바닥에 적어놓은 것처럼 쏙쏙 알고는 했다. 그러나 그 날 그들이 느꼈던 깊은 거리감과 망설임은 쉽게 이해되지 않은 채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집 앞에 서서 창문을 볼 때마다 그 날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 역시 자기 방 창문에 기대면 그 날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복잡한 감정의 일면을 알았다. 그건 후회였다. 그 날 만약 고백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략)
하나마키가 다시 손을 흔들며 떠난 후에 오이카와는 다 먹은 우유빵 봉지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이와이즈미에게 내밀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을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까지는 평소의 이와이즈미와 다를 것이 없었는데 그 후로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쓰레기를 넘겼다고 화를 내는 걸까 싶어 이와이즈미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나 지금 인상 쓰고 있냐?”
그걸 이와이즈미가 모를 리가 없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이와쨩도 연습 끝나고 신메뉴 먹으러 갈 거지?”하고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인상을 풀었다.
“그래. 근데 월말에 검사한다?”
“응? 무슨 검사?”
“왜 갑자기 모르는 척이야. 우리 저금통 말이야. 네가 이름까지 지어줘 놓고. 꿀꿀이 운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마지막의 ‘꿀꿀이 운다.’라는 말이 이와이즈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폭소가 터졌다. 이와이즈미의 팔을 붙잡은 채로 배를 잡고 웃는데 위에서 민망한 듯 “그만 웃어!”하고 오이카와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세 번쯤 소리 친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다는 듯이 오이카와의 얼굴을 밀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꿀꿀이 밥 줘야한다고 하루 종일 노래 부르던 애가 왜 새삼스럽게 웃어.”
“내가? 꿀꿀이를?”
오이카와는 아직도 픽픽 빠져나오는 웃음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났다. 그는 검지로 눈가를 훔쳐내며 꿀꿀이가 뭔지 생각해보았다. 아까 저금통 어쩌구 하지 않았나? 꿀꿀이면 돼지 저금통? 하지만 오이카와는 초등학생 이후로 돼지 저금통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잘 모르겠다는 눈을 하자 이와이즈미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오늘내일 오코노미야키랑 라멘 먹는다고 잔소리 안할 테니까 모르는 척 그만 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모르는 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정말로 이와이즈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어디서 뭘 착각하고 와서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런데도 무슨 소리냐고 묻지 못한 것은 가만히 선 채로 오이카와를 응시하는 이와이즈미가 너무나도 즐거워 보인 까닭이었다. 그럴만한 대화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지다가 결국 눈치껏 굴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착각한 것을 깨닫는다면 이와이즈미 쪽에서 먼저 ‘너 그 때 왜 아는 척 했어?’하고 물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 때 장난친 것이라고 놀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일은 오이카와의 생각만큼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뒤로도 종종 오이카와에게 꿀꿀이 이야기를 꺼냈고, 오이카와가 돈을 많이 쓸 적이면 말은 안 해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결국 오이카와는 이유도 모른 채 온갖 간식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유빵을 참는 일이 가장 고역이었다. 오이카와의 서랍 안쪽에 돈이 100엔 200엔씩 쌓이기 시작했으나 이것이 이와이즈미의 기준에 차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날이 왔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하교하던 중 슬그머니 “내일인거 알지?”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가 “알지!”하고 애써 쾌활하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저금통 이야기였다. 다음 날 등교해서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문득 ‘아니, 난 정말로 그런 저금통 만든 적이 없다니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죄를 지은 기분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도, 연습 중에도 이와이즈미는 저금통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오이카와를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모은 거 집에 두고 왔어?”
저금통 이야기가 나온 것은 하교 중이었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와이즈미는 그걸 들고 자기 집으로 오라는 말을 했다. 오이카와는 후다닥 집으로 돌아와서는 돈이 얼마나 모였는지 확인했다. 이번 달 초에 연습 끝나고 군것질을 하거나 월요일에 시내에 놀러가는 일이 잦아 얼마 되지 않았다. 반면에 이와이즈미는 매점도 잘 안가고 연습이 끝나면 딱딱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넉넉하게 모았을 것이 분명했다. 내민 돈을 보고 이와이즈미가 실망할 것 같아서 괜히 옷도 미적미적 갈아입고 슬리퍼나 신을 거면서 한참이나 신발장에 쪼그려 앉아 무엇을 신을까 고민하는 척을 했다. 결국 엄마가 “하지메쨩이 기다리겠다.”라고 말한 뒤에야 밀려나듯 이와이즈미의 집으로 향했다.
이와오이 소설본 「검은 장마」 완매
대학생이 된 후 동거 중인 시점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와이즈미와 슬럼프에 빠진 오이카와가
이렇든 저렇든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눈부신 감각이 남아있어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약품 냄새를 맡으며 조금 고개를 기울이자,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 침대 옆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당장에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고갯짓이 심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또 무슨 일로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왜 자꾸 우는 거야.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어 엄지로 눈가를 쓸었다. 이러다 깨면 제대로 누워서 자라고 말할 셈이었다.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 눈 좀 떠봐.”
내 손길과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에서 벗어났다. 놀랐냐고 묻기도 전에 잠깐 자리에서 휘청거리더니 밖으로 뛰쳐나간다. 갈 곳 잃은 허망한 나의 팔에 링겔이 꽂혀있는 것은 그때 알았다.
“아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후에야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병원이고, 나는 환자다. 그것을 깨닫자 뭉개진 딸기 케이크와 기울어진 아스팔트의 풍경이 떠올랐다.
병실 안으로 들이닥친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다음에는 의사가 들어왔다. 새하얀 가운에 눈이 어지러웠다. 의사는 뭔지 모를 검사를 하며 내게 기분이나 상태를 물었고, 사고 때의 기억이 있냐고도 물었다. 부딪치고 나서는 기억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보아도 그 부분만 긁어낸 것처럼 번쩍이는 흰 빛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딱 부딪치는 순간만 그랬다. 의사는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 밖에 몇 가지 사항을 말하는 동안 오이카와는 의사와 간호사의 뒤에서 꼭 벽에 박혀 구겨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모양새가 겁먹은 강아지처럼 위축되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꾸 신경이 쓰여서 의사의 질문을 놓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기, 죄송한데 잠시만요. 오이카와, 너 왜 그래?”
오이카와가 사고로 놀랐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뭔가 그보다 더한 느낌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실례인줄 알면서도 결국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고 서있냐니까?”
내 부름에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의사와 간호사 역시도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이카와의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오래 누워만 있다 말을 해서인지 목이 아팠다. 내가 큼큼 목을 가다듬는 사이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잘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병실 안으로 기묘한 바람이 불었다. 누구의 머리카락도 쓸어주지 못하는 묵직한 흐름이었다. 직감하건데,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모르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침묵이 알을 낳는 사이, 오이카와가 재차 입을 열었다.
“배구…… 어려울 수도 있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오이카와는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다. 쉬지도 않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다 그 말이 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오이카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침대 안의 나와 침대 밖의 저들이 만 리 밖으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꿈속의 어린 시절보다 지금이 더 꿈같다. 그는 울고 나는 흰 침대에 갇혀 허공에 압사당하고 있었다.
(중략)
‘오늘 꼭 와.’
오이카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실에 왔다. 하지만 오늘은 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당부하듯 한 번 더 보냈다. 오이카와네 팀은 3세트를 차지했고, 3-1로 승리했다. 그에게서 메일이 온 것은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 못갈 것 같다는 변명이었다.
‘그래, 시합을 했으니 피곤하겠지. 꼭 와.’
그 다음에는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한 통 걸려다가 그건 영 괴롭히는 것 같아 그만뒀다. TV를 끈 채 무릎 위로 책을 올렸다. 팔랑팔랑 몇 페이지를 넘겼지만 글자를 읽었을 뿐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손으로 책을 꽉 쥐고 뒤로 몸을 기대었다. 한숨을 푹 쉬고 눈을 감은 채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집으로 간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정도 후였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병실 앞을 서성이는 발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간호사거나 보통의 손님이라면 저렇게 오래 헤매지 않는다. 진작 노크라도 했을 것이다. 해서 문 앞의 사람이 오이카와라는 것을 곧장 알아차렸다. 십 분 정도가 더 지난 후에 병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인지 오이카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괘씸한 마음이 들어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번쩍 눈을 떴다. 까무러치는 소리를 내며 도망치려는 녀석을 확 붙잡아다가 “도망만 쳐봐라?”하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금방 울상을 짓는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오냐,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라.”
“그게…….”
우물거리는 녀석의 팔을 좀 더 끌어다가 침대에 앉혔다. 오이카와는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조심스레 겹쳤다. 눈을 깜박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어색하게 웃는다.
“오늘 시합 있다고 말하는 걸 깜박했네.”
“다른 사람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시켰지?”
“이와쨩 혹시 귀신?”
바로 앞에 거짓말을 쳐놓고는 당당하기도 하지. 냉큼 따라붙는 말이 얄미워서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튕겼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익은 벼처럼 얌전히 고개를 수그린다. 그 안으로 고개를 드밀고 “야.”하고 부르니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세게 안 쳤어. 엄살 피우지 마.”
“아니야, 엄청 아프단 말이야.”
“내 손이 더 아프거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가 오이카와의 이마에 손을 대니 어라, 조금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다. 손끝으로 이마를 더듬거리다가 모른 척을 했더니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엄지로 정 가운데를 꾹 누르며 “다음 시합은 언제야?”하고 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곧장 답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마를 쥐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비밀이야.”
“너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다가 말았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꿋꿋했다. 또 맞을까봐 이마를 한 손으로 가린 채 내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면서도 말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뿜어냈다. 나는 오이카와의 팔을 놓아주며 조금 세워둔 침대에 등을 훅 기대었다. 비스름하게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빤히 쳐다봤다. 엊그제보다는 어제가 더 마른 것 같더니, 어제보다 오늘이 더 마른 것 같다. 단순히 힘든 시합을 마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말 안한다고 내가 모르지는 않아. 나 그냥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그래. 생판 모르는 남한테 알기 싫어. 네 시합이잖아.”
나름대로 차분하게 묻는데도 답이 없었다. 속이 탔다.
“내가 너한테 관심 갖는 게 싫어?”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닌데 오이카와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그는 놀란 눈을 하고서는 몸을 내 쪽으로 홱 돌렸다.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물고 말이 없는데, 눈은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한 마디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저 고집을 누가 말려.
이와오이 소설본 「Kill Your Darlings」 재고있음
FHQ+현대. 마왕 오이카와를 죽여야하는 용사 이와이즈미와
현대에 환생한 후 서로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석양이 지는 노란 바다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고 오로지 파도소리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니 이번에는 창밖으로 해가 뜬다. 아직 반도 떠오르지 않은 그 태양 아래로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한가로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마왕성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다. 다시 걸음을 뒤로하자 이번에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사막이 펼쳐진다. 뜨거운 열기가 뺨을 괴롭히는데도 넋이 나가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래가 창틀을 타닥타닥 부딪칠 쯤에야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두어 걸음이면 금방 창밖 풍경이 변했다. 눈이 부신 설산에서 축축한 늪지가 되었다가 한적한 산길에서 용암이 펄펄 끓는 화산지대가 되기도 했다. 끝없는 복도와 걸음마다 바뀌는 창밖의 풍경이라니, 꿈도 이보다는 현실적이리라. 지루할 틈이 없게 해주겠다던 말은 허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내가 이끌고 온 마왕토벌대는 분명 마왕성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붉은 문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고개를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끝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살짝 만지자 거짓말처럼 밀려났다. 그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마왕이 직접 문을 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까닭이다.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달래며 그 문을 통해 진입했다. 어둡고 깊은 터널을 한참이나 걷던 나는 주변이 소름 끼칠 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떼를 지어 뒤를 따르던 병사들의 발소리가 사라져있었다. 몸을 돌리자 그 자리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이 나를 향해 서있었다.
남자는 머리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작은 등 하나만 들고 있다. 여태껏 내 뒤를 따라왔다고 말하기에는 그 빛이 너무 환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촛대를 쥔 손은 희고 그 손가락에 박힌 손톱은 죽은 사람처럼 검었다. 검을 꽉 쥔 채로 상대를 노려보았지만 로브 아래 보이는 입은 태연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마왕 오이카와라는 것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어떠한 증거 없이도 확신을 가졌다. 그는 내게 한 걸음 다가서며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반듯한 얼굴이 화창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이와쨩.”
오이카와는 이미 날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걸었다.
“날 어떻게 알지?”
인상을 찌푸리며 물으니 반가운 듯 웃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손에 쥐고 있던 촛대를 떨어뜨릴 만큼 허둥거리기까지 했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며 칼을 겨누었다. 오이카와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나를 몰라?”
적의라고는 하나 없이 어린아이처럼 군다 해도 마왕은 마왕이었다. 칼을 냅다 휘두르자 오이카와가 눈을 깜박였다. 그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였는데도 칼이 그에게 닿지를 않았다. 마치 누가 내 옷깃을 잡고 자꾸만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와 나는 한참이나 촛불을 사이에 두고 그 난리를 피웠다. 아니, 땀을 흘리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었고 오이카와는 속상하다고 훌쩍거리기까지 하며 발을 땅에서 떼지 않았다. 우는 사람에게 의미 없는 칼질을 반복하는 일에 진이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땅에 칼을 꽂고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오이카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촛대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자기 얼굴을 느리게 더듬거린다.
“이와쨩, 내 얼굴 잘 봐봐. 기억 안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대역 죄인이라는 뜻이냐?”
“대역죄라니!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마왕이랑 친구면 대역 죄인이지……. 그럼 이와쨩은 대역 죄인이네!”
듣자듣자 하니 마왕 죽이러 여기까지 온 사람을 마왕 친구로 만들지를 않나, 심지어는 대역 죄인까지 만들어버린다. 따지듯 “대체 누가 네 놈이랑 친구라는 거야.”라고 말하자 오이카와는 눈에 보일 만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구나. 이와쨩은 날 기억 못하는 구나.”
(중략)
옷 속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오는 바람에 펄쩍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데 이번에는 아예 이불 속으로 차디찬 몸을 들이민다. 차갑다고 밀어내도 목을 꼭 끌어안고 버티는 통에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결국 오이카와의 언 몸을 녹이는 인간난로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마른하늘의 날벼락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잡아당기는 일을 반복하자 오이카와가 또 다시 몸 안에 손을 쑥 집어넣는 바람에 “차갑다고!”하며 소리를 쳐야했다. 그 소리를 듣고 방까지 찾아온 엄마는 그러지 말고 슬슬 일어나라며 채근했다. 아주 오랜만의 늦잠이었다. 휴교일이 월요일인 덕에 찾아온 꿀 같은 날이었건만 오이카와는 잠도 안자고 여기까지 쳐들어왔다.
“넌 날 괴롭히려고 태어났지?”
자꾸 장난 칠 생각만 하기에 오이카와의 귀를 쭉 잡아당겨주었더니 엄살 섞인 비명을 지른다. 이내 이불이 토해내는 모양새로 침대를 탈출하더니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오프에 나랑 그 개 보러 가기로 했잖아!”
“이렇게 이른 아침일 줄 상상이나 했겠냐?”
“꼭두새벽이건 해 진 다음이건 내가 찾아왔는데 반겨주지는 못하고 구박이나 하고!”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침대 밖으로 나섰다. 이불을 정리하는 사이 오이카와는 밖으로 나가서 여기서 아침을 먹어도 되느냐고 졸라댔다. 엄마야 오이카와가 오는 걸 보자마자 그 애 몫까지 준비하셨을 테니 안 될 리 없었다. 하품을 하며 방밖으로 나가자 오이카와가 식탁 주변을 오가며 젓가락을 놓고 있었다. 이 집 아들보다 낫다. 문제는 나도 저 집에 가면 ‘이 집 아들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두 집 부모님이 자식을 바꾸자 제안해도 할 말이 없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니 상이 다 차려져 있었고 부모님과 오이카와는 이미 식탁에 앉아있었다.
“토오루가 젓가락이랑 컵 놓는 동안 넌 뭐했니?”
“세수도 하고 이도 닦았어요.”
예상했던 잔소리를 하시기에 늘 하던 대로 대꾸했을 뿐인데 다들 웃으며 핀잔이었다. 오이카와가 찾아오는 날이면 식탁이 유난히 떠들썩했다. 겨우 아침상일 뿐인데 꼭 저녁 같았다. 아빠는 오이카와가 꺼내려는 개 이야기의 서두만 듣고 일어나느라 아쉬운 눈치였다. 거기서 별 이야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시라 대꾸했다가는 나만 야단맞을 것이 뻔하니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아빠를 배웅한 후에 우리는 식사를 다 마치고도 수다를 떨었다. 사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엄마와 오이카와만 떠들었다.
오이카와는 요새 사람들이 예뻐하는 동네 개가 있지 않냐며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먹을 것도 주니까 말을 그렇게 잘 듣는다면서요? 할아버지부터 어린애까지 다 좋다고 꼬리 흔들고 쫓아다닌대요.”
“응, 나도 한참 쫓아오기에 소시지 하나 준 적 있어.”
“그쵸. 근데 그 개가 저만 보면 도망가거든요.”
오이카와는 무슨 진지한 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엄마는 웃음을 터뜨리며 “토오루 너는 원래 동물들이랑 사이가 안 좋잖니.”했다. 오이카와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수선을 피웠다. 예전에 내가 다 똑같은 말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모양이다.
이와오이 소설본 「그 애가 말했다」 완매
네임버스 세계관으로 이름이 생긴 후에도 썸만 타는 이야기
평화로워야 할 저녁 한 때, 온가족의 시선이 욕실로 향해있었다. 목욕을 하겠다며 들어간 막내아들은 샴푸를 우당탕 떨어뜨리고 비눗물에 미끄러졌는지 새된 비명소리를 냈다. 간신히 욕조에 들어가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말연습에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욕실을 두드리고 “토오루, 무슨 일 있니?”하고 물어보면 시침 뚝 떼고 “아무 일 없어요!”하고 답해왔다. 하는 수 없이 욕실에서 멀어지면 그 소란이 반복되었다. 자기 뺨을 때리는지 찰싹찰싹 거리는 소리까지 요란했다. 저러다가 양 뺨이 빨갛게 부어서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 걱정의 근원지인 오이카와는 욕조에 길쭉한 몸을 접어 넣고 한껏 웅크려 있었다. 목욕물 위로 삐져나온 무릎 두 개에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쉬어도 머리가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이카와는 귀갓길에 이와이즈미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고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근래의 이와이즈미는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엉겨 붙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이와이즈미가 짜증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늘 있는 일이었다. 더운 날이면 더 그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구박을 한바가지 쏟아내며 이마를 쥐어박을 걸 알면서도 이와이즈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처분을 받고나면 또 가만히 무릎을 빌려주는 걸 알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위쪽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낯선 기분에 이와이즈미의 턱 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금방 알아채고 시선이 따라온다. 오이카와는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왜 안 때려? 내가 귀여워서?”하고 물었다. 그제야 한 대를 얻어맞았다. 손바닥이 불쑥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이마를 찰싹 친다. 아무리 의도가 찰싹이었다고 한들 그게 이와이즈미 손바닥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오이카와는 양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우는 소리를 냈다. 사방에서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팡팡 터진다. 안 맞는다고 그렇게 까불더니만 결국 한 대를 얻어맞았다면서, 그럴 만했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주말연습이라 평소보다 사람이 적어서 다들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투덜거리는 소리에 이와이즈미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틈새로 내다보니 그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치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두 손 위로 자기 손을 갖다 대고 둥글게 문질렀다.
“하여간 엄살은.”
그 말이 아주 느리게 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바닥은 오이카와의 손등에 닿아있었다. 부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 동안 이와이즈미의 손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러한 행동의 간격들은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만이 알아볼 수 있게끔 벌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요즘 들어 이와이즈미가 상냥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분명 “걔 원래 그렇잖아.”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괴팍한 상냥함과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자기가 지을 표정이 심히 걱정되었다. 분위기를 읽어놓고도 확신이 없어 말은 헛돌기만 했다. 괜히 덥지 않냐고 시원한 곳을 찾아간다고 도망치는 날이 자꾸만 쌓여갔다.
그러다 오늘이 온 것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진지하고 웃음기 하나 없었다. 처음에는 고민이 있나 싶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뭔가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꿋꿋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세워놓고 또박또박한 말씨로 말했다.
“다음 주말에 여름축제 가자.”
그 말을 들은 순간에 오이카와는 마치 코트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머리를 굴려야했다. 이와이즈미의 의도나 자기가 해야 할 답을 촤르륵 늘어놓고 그 중 뭐가 좋을 지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아, 그거? 가고 싶어?”
오이카와는 자기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이와이즈미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좋아, 잘했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어느 면에서 잘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그 ‘잘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웬일로 그런 걸 다 가자고 해? 애들은 누구누구 가려나?”
“아니, 둘이서 가자.”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고, 말하고자하는 바가 분명했다. 그때만큼은 오이카와도 발치의 확신을 주워들 수 있었다. 거기에 대고 바보처럼 “왜?”라거나 “둘보다는 여럿이 재미있지 않아?”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그는 눈을 수없이 깜박거리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와이즈미는 편한 웃음을 지으며 오이카와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내일 봐.”
오이카와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방금 전 대화를 곱씹어보는 지도 모르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의 오이카와가 자기 걸음걸이가 이상하지는 않은지 수 백 번을 고민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간신히 현관문을 닫은 후에 한 번쯤 뒤돌아봐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십 년 넘게 등하교를 같이 한 소꿉친구인데도 모든 일이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니 오이카와가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온 집안을 들쑤시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욕을 하러가겠다며 욕실 앞에서 후다닥 옷을 벗었다. 그렇게 지금의 광경이 완성된 거였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수없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저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었냐는 것이 오이카와의 최대 의문이었다. 단순한 데이트인가? 아니면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고백하면 우리가 사귀게 되는 건가? 오이카와는 뜻 모를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쭉 뻗고 목욕물을 참방거렸다. 그러다가 한없이 가라앉은 얼굴로 사실 다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쯤에는 목욕물이 한껏 줄어들어서 몸까지 다 서늘했기 때문에 따뜻한 물을 좀 더 받아야했다. 아닐 거야. 누가 봐도 고백 아니면 데이트라고.
열심히 마음을 다스리며 물을 잠그는데 손목이 갑자기 시큰거렸다. 꼭 정전기처럼 퍼뜩 놀라게 되는 감각이었다. 오이카와는 어깨를 움츠리며 손목을 움켜잡았다가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손목 안쪽에서 살갗이 빨갛게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금방 가라앉으며 검은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하얗게 된 머리로 그 글자를 읽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욕실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그의 엄마가 욕실 문을 벌컥 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걱정 어린 물음에 오이카와는 “엄, 엄마.”하고 말을 더듬거리며 자기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빨갛고 하얀 얼룩덜룩한 얼굴로 “이와쨩이…….”하고 말했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결국 엄마를 욕실 밖으로 내보낸 후로도 오이카와는 한참이나 욕조에 앉아있었다. 간신히 욕실을 빠져나와서는 핸드폰을 들고 방을 굴러다니며 이와이즈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일 만나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나은지 고민하기 바빴다. 수시로 손목에 생긴 글자를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문질러보았지만 더 이상 부어있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지워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기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면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오늘은 한숨도 잘 수 없을 것이다.
이와오이 소설본 「난파선」 재고있음
인쇄본(은박) / 62페이지 / 6,000원
이와이즈미가 죽은 오이카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아가는 이야기.
연령AU, 타임리프, 부상 소재.
샘플▼
아주 어릴 적에, 옆집에 고등학생 형이 살았다. 우리 집과 옆집은 부모님 사이에 나이 차이가 제법 있었지만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는지 왕래가 잦은 편이었고, 덩달아 그 형을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고등학생과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애가 하는 대화라고는 “집에 부모님 계시니?”라거나 “엄마가 갖다 드리래요.”하는 이웃사촌의 뻔한 말뿐이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가 늘 운동복 차림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이따금 새 신발을 신고 나타날 때도 있었지만 그의 신발은 너무 빨리 해져서 신발 앞코가 금방 까맣게 되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옆집 이와이즈미 씨네 아들은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대.”라고 말했을 때부터 그 낡은 신발이 멋있어 보여서 괜히 신발을 돌에 문질러본 적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방 싫증이 나버렸다.
그러다 한 번은 부모님이 나를 옆집에 맡겨놓은 적이 있었다. 왕래가 있다 보니 곧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날은 아주머니 대신 그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어린애를 돌본 적이 없는지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낯설어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리모컨을 들고서 “만화 볼래?”하고 묻기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시간에는 재미있는 거 안 해요.”
“아, 그러냐? TV를 잘 안 봐서 모르겠네.”
오늘 이 집에 막 들어섰을 때, 그가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려냈다. 두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그의 방을 가리켰다.
“저도 게임할래요.”
그러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방으로 쑥 들어갔다. 방문에 걸쳐 서서 그가 하는 모양새를 보았다. 그는 어떤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어린애가 할 만한 게임이 없는데…….”라며 중얼거렸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게임팩에는 죄다 군인과 총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야 어린 마음에 ‘왜 안 돼?’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 후에는 그가 느꼈을 당혹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내가 자그마한 반발심을 일으키는 사이 그는 안 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공놀이 좋아해?”
공놀이라면 체육시간에 가끔 하지만 영 재미가 없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는데 그가 내 앞에 몸을 숙이고 “뭐 해봤는데?”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가며 축구나 피구 같은 이름을 댔다. 사실 제대로 하기보다는 그저 흉내를 냈을 뿐이지만 어쨌든 해본 건 해본 거였다. 내 말을 끝까지 듣던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럼 배구도 해보자.”라고 말했다. 내가 애매한 얼굴을 지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나 어릴 땐 공놀이밖에 안 해서 뭐가 재밌을지 모르겠거든. 하다가 정 재미없으면 밥이나 시켜 먹자. 원래는 혼자 있으면 대충 먹는데 엄마가 너 온다고…….”
그는 늘여놓은 게임팩을 상자에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밥 먹을 시간 멀었는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가 알록달록한 배구공을 허공에 던졌다 놓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집안이었으니 그가 배구공을 던진 높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모습이 이상할 만큼 눈에 꽉 찼다. 그는 내 어깨를 쥐며 “나가자.”하고 말했다. 더 이상의 군소리 없이 얌전히 그를 따라나섰다. 그와 동네 놀이터에서 그 알록달록한 공을 한참동안 주고받았다. 그는 집안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이 공을 던지고는 시선을 한 곳에 붙박았다. 공을 내리치고서 “체육관이 아니라서 세게는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그가 제대로 배구하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이를 돌보는 재주가 요만큼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 같다. 내 눈높이에 맞춰 공을 던져주거나 내가 엉터리로 공을 던지면 요령껏 쳐서 잘했다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잘하네. 나중에 배구부에 들어가. 분명 재미있을 거야.”
어린애가 잘해봐야 얼마나 잘했겠는가. 그냥 흘려보내는 칭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배구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옆집 형에게 영향을 받은 모양이라며 웃었고 아빠는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가족 중 누구도 내가 배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배구교실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배구공을 안고 다녔고, 틈만 나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배구영상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가족들도 내가 배구를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나는 봐주길 바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만날까 싶어 심부름도 자주 하고, 그의 집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공을 이만큼이나 잘 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경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무척 짧았고, 설령 집에 머무른대도 아이와 마주칠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와 만나지 못한 채로 반 년, 그가 도쿄의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어린애의 작은 희망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던 내가 다시 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내 배구가 최악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연습을 마구잡이로 늘린 것은 물론이었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로드워크를 하러 나섰다. 주변에서 이를 알고 말리기 시작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방해물로 여겨졌다. 식사 역시 과하게 하는 탓에 체를 하거나 토해내는 일이 잦았다. 몸이 만들어지기는커녕 망가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였으니 쓰러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병실로 찾아온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할 거라면 배구를 그만두라고 성을 내고, 어머니와 형이 말리느라 난리가 났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빠르게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족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배구영상을 찾아보았다.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 저렇게 강한 서브를 넣고 싶어.
빨려들어 갈 것처럼 영상을 보던 중 그를 찾아냈다. 빠르게 움직이는 카메라 사이로 그가 나타나 스파이크를 꽂았다. 카메라가 팀메이트와 부둥켜안는 그를 가깝게 잡아냈다. 하단에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그는 어깨를 돌리며 씩 웃었다. 그가 점수를 넣는 순간의 쾌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넋 놓고 보았다.
‘잘하네. 나중에 배구부에 들어가. 분명 재미있을 거야.’
코트 위를 누비던 그가 내게 해주었던 짤막한 말을 떠올려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더니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여태껏 타인이 건넨 어떤 말보다 화면 속에서 포효하는 그가 더 분명하게 와닿았다.
이후에는 여태껏 헤맨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침착해졌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 스스로도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한동안 배구하는 걸 반대하던 아버지도 다시 응원해주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지금까지 눈치만 보던 것과 달리 옆집에 찾아가 이와이즈미가 언제쯤 집에 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와이즈미의 어머니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그 애는 잘 안내려와. 보통 우리가 찾아간단다.”하고 말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기운 없이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까맣게 닳아버린 신발 앞코가 보였다. 이제는 괜히 돌에 문대지 않고도 신발이 빨리 해졌건만 자랑스레 보여줄 사람이 없었다. 실망감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수와 팬이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코트로 가야지. 어차피 갈 생각이었지만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고등학교는 당연히 아오바조사이로 정했다. 이와이즈미가 민트색 져지를 입고 있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아오바조사이의 주전이 되고 주장이 되는 동안 이와이즈미 역시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부원들이 연습 중에 그의 스파이크나 서브를 참고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초조함도 함께 찾아들곤 했다.
체육관 한구석에 부원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뭘 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주장으로서의 책임도 있는지라 그 쪽으로 다가갔다.
“다들 연습 안하고 뭐해?”
그러자 무리 중에 일학년들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 다음은 이학년이었고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하나마키였다. 그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아주 뻔뻔한 말씨로 말했다.
“이와이즈미 선수 봐.”
“어디, 어디?”
하나마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거 재작년 경기잖아.”라고 했더니 하나마키가 질색을 했다.
“야, 징그러워.”
“아, 아니. 이 시합이 좀 특이했단 말이야. 너네도 그래서 찾아보는 거 아니야?”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변명을 하자 그럴 것 없다며 손을 휘휘 내젓는다. 우리는 그대로 둘러앉아 그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두세 번 돌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봐도 모르겠다. 직접 해보자!”
그러자 다들 “네!”하고 큰소리로 답하고서 코트로 올라섰다. 애들은 하나마키에게 맡기고 나는 서브 연습에 들어갔다. 얼마 전부터 괜찮은 서브가 나올 듯 말 듯 해서 한참 약이 오르던 참이었다. 봄고가 시작하기 전에는 확실하게 완성시켜두고 싶었다. 몇 번이나 서브를 내리꽂다가 다시 다른 부원들과 함께 연습을 하면서 봄고 팀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했다. 그러다보면 금방 해가 지고 배가 텅 비어버리는 저녁이 왔다. 부원들과 짐정리를 하던 도중에 일학년 하나가 “영상으로 봐서는 쉬워 보이는데 좀처럼 안 되네요.”하고 투덜거렸다.
“그게 바로 되면 아무나 프로하게?”
“그건 그렇지만요.”
당연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이제 슬슬 나가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하나마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네 그거 알아? 오이카와 옆집에 이와이즈미 선수 살았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심이 쏠렸다.
“진짜요? 언제요?”
어깨에 가방을 단단히 메며 손을 내저었다. 하나마키를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긴 살았는데 엄청 옛날이야. 벌써 십 년…… 십 년 좀 덜 됐다.”
“그래도 대단해요! 만난 적 있으신 거잖아요.”
대단하긴.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는데. 들떠있는 후배들에게 그런 김빠지는 말을 하는 대신 “옆집이라 가끔 봤어.”라고만 말해주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의기소침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썰렁했다.
터덜터덜 걸어서 현관문을 열었는데 반겨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외치자 부엌에서 “응.”하는 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그 이후로는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지 막내아들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어리광을 피울까 싶어 부엌으로 향했는데 까만 뒤통수가 식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반듯한 어깨를 보며 손님이 오셨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빤히 응시하자 나도 모르게 숨을 헉 삼켰다. 마주앉은 엄마는 웃으며 “토오루, 누가 왔게?”하고 물었다. 영상으로 수없이 되감아본 얼굴이 눈앞에, 그것도 우리 집에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수?”하고 큰 소리로 외친 후에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쟤가 경기영상을 몇 번을 돌려보는지 몰라. 괜찮으면…….”
엄마가 웃으며 꺼내는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방으로 도망쳤다. 이와이즈미의 놀란 눈이 시선에 슬쩍 걸쳤다. 방문에 기대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시 생각해보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도망쳤지? 지금이라도 나가면 너무 바보 같을까? 다시 만나면 의젓하게 인사할 거라고 몇 년을 다짐했는데……. 후회가 휘몰아쳐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러는 사이 방문 너머로 “이만 가보겠습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그에게 미안하다며 마중 나가는 소리 또한 들었다.
“얘, 토오루!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으면서 왜 도망을 가고 그러니? 잠깐 인사 온 사람을 너 보고 가라고 붙잡은 건데.”
엄마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내 방문 앞으로 와서 외쳤다. 발을 동동거리다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갔어요?”
“방금 갔어. 미안해서 어떡하니. 음식이라도 해갈까.”
손톱을 깨물다가 창문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아래로 남자의 그림자가 졌다. 옆집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으니 그는 금방 사라질 것이다. 아쉬운 숨을 토하던 때였다. 그가 내 창문 쪽으로 정확하게 돌아섰다. 깜짝 놀라 커튼을 잡아당겼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안녕.”
거리가 있어 작은 소리였지만 선명하게 닿았다.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이와이즈미는 그늘 진 얼굴로 웃었다. 가로등이 만들어낸 그림자였을 지도 모르건만,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자리를 뜨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한참이나 창문에 기대어 있었고, 이와이즈미 또한 오래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움직인 것은 거리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후였다. 그는 어떤 여자와 대화를 하다가 내 쪽을 한 번 더 보고는 옆집으로 들어갔다. 창문 아래로 몸을 웅크리며 든 생각은 드디어 만났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쩌면 한 번 더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와오이 웹재록본 「손가락 곡예」 완매
인쇄본(적박·날개) / 약 286페이지 / 16,000원
수록목록
공중그네, 구원, 낮달, 망각, 목 없는 그림자, 무화과 꿈, 바다무덤, 가시들판,
바보로봇, 어떤 기록, 얼룩, 잠들지 못한 두 사람의 이마, (제목없음)
(AU, 감금, 모브여캐, 가정폭력 등 취향타는 소재를 포함하고 있으니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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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글인 기적(사망소재 주의) 외 미공개분 삼월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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