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영화 비밀AU로 쓰던 글은 이쪽
다음 행사에 내고 싶은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다르게 쓰다보니
구원은 비밀AU라 말하기에는 많이 민망하게 되었다
모브캐, 사망소재 주의. 미완입니다
이와이즈미가 은퇴를 선택한 날은 해가 아주 뜨거웠다. 그늘 한 점 없는 곳에 서 있으면 온몸이 녹아버릴 것처럼 정수리가 뜨겁고 살갗에 닿는 바람조차 불쾌하게 느껴지는, 하필 그런 날을 골라 프로생활의 마지막을 고했다. 몸이 고장 난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창 몸값이 불어나던 때였기에 주변에서 잔뜩 말렸을 텐데 이와이즈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도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이었기에 누구도 말릴 기회가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는 은퇴 직전에 고작 한 마디를 했다. 미련은 없습니다. 그 말에 그를 대단한 선수라고 추켜세우던 사람들이 탄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게 말해야 탄식이지 그보다 더 험한 말도 나왔을 게 분명하다.
은퇴 소식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도 전해졌지만 그보다는 인터넷 기사 쪽이 더욱 빨랐다. 이와이즈미가 한 번도 자기 입으로 은퇴를 예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어안이 벙벙한 사람이 한 둘이었겠냐만, 지금 이와이즈미의 집 앞에 서있는 소년만큼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년의 손에는 조금 오래된 기종의 핸드폰이 들려있었고, 그 화면에는 이와이즈미의 은퇴 기사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열심히 핥던 아이스크림을 입에 그대로 문 채 눈만 커다랗게 뜨고 핸드폰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리는 걸 반복했다. 그때마다 소년의 핸드폰에 걸려있는 ‘하루’라고 적힌 핸드폰 고리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하루는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깨물어 먹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잠기지 않은 문이 스스럼없이 열리며 밖에 비해 쾌적한 공기를 뱉었다.
“이와이즈미 씨, 이거 봐요. 이게 무슨 소리에요?”
하루는 배구화를 급하게 벗어던지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이 은퇴한 배구선수 하나, 무럭무럭 자라는 고등학생 하나로 복작복작해졌다. 이와이즈미는 새로 꺼낸 선풍기를 닦으면서 무덤덤하게 “뭐가 무슨 소리야.”하고 대꾸했다. 하루는 이와이즈미의 옆에 앉아 핸드폰 액정을 드밀었다. 여전히 화면에는 이와이즈미의 은퇴 기사가 떠있었다.
“은퇴해요? 나한테 말도 없이?”
“내가 너한테 왜 말을 해야 하는데?”
“스승과 제자 사이잖아요! 매일 얼굴 보는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요?”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뭔가 말해줄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턱 끝으로 이미 켜져 있는 선풍기를 가리켰다.
“더우면 저걸로 바람이나 쐐. 아이스크림 막대 바닥에 버리지 말고.”
하루는 인상을 찌푸리며 선풍기 방향을 자기 쪽으로 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와이즈미는 선풍기 날을 꼼꼼하게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가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끽해야 저녁 먹고 바로 집으로 갈 텐데 사람이 왔다고 선풍기 하나 더 닦는 걸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참 답답하게 여겨졌다. “돈도 많이 벌 텐데 에어컨을 사지.” 하루는 다 들리도록 투덜거렸지만 이와이즈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어도 돼요?”
“어차피 너 먹으려고 사온 거잖아.”
“당연히 이와이즈미 씨 먹으라고 사온 거죠.”
이번에도 대꾸가 없다. 이럴 때는 더 말을 걸어봐야 의미가 없으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뜯기로 한다. 하루는 비닐봉지를 뒤적뒤적 거리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고 이와이즈미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안 먹을 거죠?”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부 냉동실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문 채로 닫힌 냉장고 문을 빤히 보았다. 거기에는 사진 하나가 둥근 자석과 함께 붙어있었다. 학창시절의 이와이즈미와 함께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어깨를 바짝 붙이고 활짝 웃고 있다. 이 소년의 사진은 이와이즈미의 집안 곳곳에 있었다. 냉장고뿐만 아니라 방 벽에도 하나 붙어있었으며, TV 옆에도 작은 액자가 있었다. 언젠가 이와이즈미의 앨범을 몰래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 안에도 이 소년의 얼굴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소년의 독사진도 여럿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누구의 앨범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꼼꼼하게 채워진 앨범은 거기에서 멈춰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라거나 프로팀에 입단한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하루는 냉장고에 붙은 사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그는 벌써 선풍기를 다 조립하고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요.”
이와이즈미가 다시 고개를 든다. 짧고 뾰족한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하루의 손끝에 닿는 것과 동시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루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진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 사람 되게 잘생겼네요.”
“그 사진 만지지 마.”
“알았어요. 미안해요.”
하루는 항복을 하는 것처럼 양 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올렸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로 자기 엉덩이 근처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한참동안 채널을 뒤적거리더니 결국 스포츠채널에서 멈췄다. 낙이라고는 운동밖에 없는 남자다운 선택이었다. 하루는 이와이즈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냉장고에 붙어있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와이즈미를 알게 된 것은 반 년 전으로 기간에 비하면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집에도 종종 놀러올 정도니만큼 그의 친구도 몇 만난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츠카와라거나 하나마키 같은 사람들로 빡빡한 이와이즈미가 가깝게 지낸다기에는 제법 여유로운 데가 있었다. 그들은 하루를 보면서 “요새 이와이즈미가 가르친다는 애가 너구나?”하고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반면에 사진 속의 이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누구냐고 물은 적도 있었지만 이름을 듣기는커녕 참견하지 말라는 소리나 들었다.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은 소중하게 붙어있고, 물어보면 예민하게 반응하고……. 하루는 알 것 같다는 듯 손뼉을 쳤다.
“이 사람 이와이즈미 씨의 첫사랑이죠?”
리모컨이 얼굴로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하루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팔에 부딪힌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충격으로 쏟아진 건전지가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협탁 아래로 사라졌다. 하루는 얼굴을 막은 팔 아래로 그 건전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는 왜 이리 과민반응이냐고 말을 꺼내려다가 마주한 이와이즈미의 눈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모두 침묵했기 때문에 선풍기 소리만이 요란했다.
하루는 천천히 팔을 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매서운 시선은 하루의 입꼬리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아까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리모컨이 아니라 더한 것도 던질 기세였다. 소년은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이와이즈미 씨가 은퇴 때문에 기운이 없을까봐 농담한 거예요. 싫으면 이제 안할게요.”
“알았으니까 집에서 나가.”
애써 꺼낸 말이었으나 이와이즈미의 반응은 냉랭했다. 하루는 이마를 긁적거리며 이와이즈미에게 다 들리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려놓았던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서기 전에 이와이즈미는 “내일 연습 빼먹지 마.”라고 당부의 말을 했다. 그것이 기이하게 들렸기 때문에 한 번 돌아보았지만 이와이즈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루가 밖으로 나간 후에도 이와이즈미는 굳어버린 사람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얼굴은 TV를 향해 있었지만 화면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눈을 한 번 꿈벅이고는 방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두 대나 돌아가고 있던 선풍기 중 한 대를 끄고 협탁 아래서 건전지를 꺼내 다시 끼웠다. 냉장고에 붙은 사진을 떼어내 방 책상에 올려둔 후에 마지막으로는 하루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비닐 째 묶어 쓰레기통 앞에 가서 섰다. 전화가 울린 것은 그 아이스크림을 버리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을 때였다. 그는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하루의 이름을 보았고, 그 순간에 아이스크림을 버렸다.
여보세요. 이와이즈미는 아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낯선 눈길로 방안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전화가 끊어지기도 전에 운동화 뒤축을 접은 채로 집을 뛰쳐나갔다. 멀쩡하게 걸어 나간 아이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연락이었다. 제발.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차에 올라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헛된 말은 좁은 차안을 돌다가 엔진소리에 삼켜졌다. 오이카와, 제발……. 그는 하루의 이름 대신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며 핸들을 세게 쥐었다. 차 안의 뜨거운 열기로 금방 땀이 맺혔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종종 이런 잔소리를 했다.
“이와쨩 은근 성격 급해서 운동화 제대로 안 신고 나갈 때가 많잖아. 그러면 신발이 금방 망가진다고. 우리처럼 운동하는 애들은 안 그래도 신발 자주 바꿔야하는데 막 신으면 어떻게 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발뒤꿈치를 검지로 가리키며 짐짓 엄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와이즈미의 습관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말해줘도 하루 이틀이지, 마음 급한 일이 생기면 또 신발 뒤축을 꾹 밟고서 뛰쳐나가고는 했다.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건 사실 오이카와의 탓이 컸다. 이와이즈미의 급한 일은 주로 오이카와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가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체육관으로 오지 않고 있거나, 몸 상할 만큼 심한 장난을 치고 있거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이 보일 때면 어김없이 신발을 구겨 신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발뒤꿈치를 가리켰다.
“이와쨩은 요령이 없어. 그렇게 급하면 소리를 지르면 되는 걸. 꼭 달려온다니까.”
무얼 그렇게 잘했다고 뻔뻔하게 뱉는 말에 성화를 부리는 것 역시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와이즈미는 매번 신발을 구겨 신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신발 뒤축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늘 오이카와가 하는 말을 그냥 넘기는 일이 없었다. 얼굴을 마주 볼 적에는 지긋지긋하다고 고개를 돌려도 헤어진 다음에는 어김없이 자기 운동화를 살피며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이와이즈미 스스로 뿐만 아니라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주변인물까지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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