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소설본 「그 애가 말했다」
이와오이 소설본 「그 애가 말했다」
A5 / 24페이지 / 3000원
네임버스 세계관으로 이름이 생긴 후에도 썸만 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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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워야 할 저녁 한 때, 온가족의 시선이 욕실로 향해있었다. 목욕을 하겠다며 들어간 막내아들은 샴푸를 우당탕 떨어뜨리고 비눗물에 미끄러졌는지 새된 비명소리를 냈다. 간신히 욕조에 들어가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말연습에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욕실을 두드리고 “토오루, 무슨 일 있니?”하고 물어보면 시침 뚝 떼고 “아무 일 없어요!”하고 답해왔다. 하는 수 없이 욕실에서 멀어지면 그 소란이 반복되었다. 자기 뺨을 때리는지 찰싹찰싹 거리는 소리까지 요란했다. 저러다가 양 뺨이 빨갛게 부어서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 걱정의 근원지인 오이카와는 욕조에 길쭉한 몸을 접어 넣고 한껏 웅크려 있었다. 목욕물 위로 삐져나온 무릎 두 개에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쉬어도 머리가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이카와는 귀갓길에 이와이즈미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고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근래의 이와이즈미는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엉겨 붙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이와이즈미가 짜증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늘 있는 일이었다. 더운 날이면 더 그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구박을 한바가지 쏟아내며 이마를 쥐어박을 걸 알면서도 이와이즈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처분을 받고나면 또 가만히 무릎을 빌려주는 걸 알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위쪽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낯선 기분에 이와이즈미의 턱 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금방 알아채고 시선이 따라온다. 오이카와는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왜 안 때려? 내가 귀여워서?”하고 물었다. 그제야 한 대를 얻어맞았다. 손바닥이 불쑥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이마를 찰싹 친다. 아무리 의도가 찰싹이었다고 한들 그게 이와이즈미 손바닥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오이카와는 양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우는 소리를 냈다. 사방에서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팡팡 터진다. 안 맞는다고 그렇게 까불더니만 결국 한 대를 얻어맞았다면서, 그럴 만했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주말연습이라 평소보다 사람이 적어서 다들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투덜거리는 소리에 이와이즈미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틈새로 내다보니 그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치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두 손 위로 자기 손을 갖다 대고 둥글게 문질렀다.
“하여간 엄살은.”
그 말이 아주 느리게 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바닥은 오이카와의 손등에 닿아있었다. 부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 동안 이와이즈미의 손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러한 행동의 간격들은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만이 알아볼 수 있게끔 벌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요즘 들어 이와이즈미가 상냥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분명 “걔 원래 그렇잖아.”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괴팍한 상냥함과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자기가 지을 표정이 심히 걱정되었다. 분위기를 읽어놓고도 확신이 없어 말은 헛돌기만 했다. 괜히 덥지 않냐고 시원한 곳을 찾아간다고 도망치는 날이 자꾸만 쌓여갔다.
그러다 오늘이 온 것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진지하고 웃음기 하나 없었다. 처음에는 고민이 있나 싶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뭔가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꿋꿋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세워놓고 또박또박한 말씨로 말했다.
“다음 주말에 여름축제 가자.”
그 말을 들은 순간에 오이카와는 마치 코트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머리를 굴려야했다. 이와이즈미의 의도나 자기가 해야 할 답을 촤르륵 늘어놓고 그 중 뭐가 좋을 지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아, 그거? 가고 싶어?”
오이카와는 자기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이와이즈미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좋아, 잘했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어느 면에서 잘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그 ‘잘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웬일로 그런 걸 다 가자고 해? 애들은 누구누구 가려나?”
“아니, 둘이서 가자.”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고, 말하고자하는 바가 분명했다. 그때만큼은 오이카와도 발치의 확신을 주워들 수 있었다. 거기에 대고 바보처럼 “왜?”라거나 “둘보다는 여럿이 재미있지 않아?”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그는 눈을 수없이 깜박거리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와이즈미는 편한 웃음을 지으며 오이카와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내일 봐.”
오이카와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방금 전 대화를 곱씹어보는 지도 모르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의 오이카와가 자기 걸음걸이가 이상하지는 않은지 수 백 번을 고민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간신히 현관문을 닫은 후에 한 번쯤 뒤돌아봐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십 년 넘게 등하교를 같이 한 소꿉친구인데도 모든 일이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니 오이카와가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온 집안을 들쑤시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욕을 하러가겠다며 욕실 앞에서 후다닥 옷을 벗었다. 그렇게 지금의 광경이 완성된 거였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수없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저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었냐는 것이 오이카와의 최대 의문이었다. 단순한 데이트인가? 아니면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고백하면 우리가 사귀게 되는 건가? 오이카와는 뜻 모를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쭉 뻗고 목욕물을 참방거렸다. 그러다가 한없이 가라앉은 얼굴로 사실 다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쯤에는 목욕물이 한껏 줄어들어서 몸까지 다 서늘했기 때문에 따뜻한 물을 좀 더 받아야했다. 아닐 거야. 누가 봐도 고백 아니면 데이트라고.
열심히 마음을 다스리며 물을 잠그는데 손목이 갑자기 시큰거렸다. 꼭 정전기처럼 퍼뜩 놀라게 되는 감각이었다. 오이카와는 어깨를 움츠리며 손목을 움켜잡았다가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손목 안쪽에서 살갗이 빨갛게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금방 가라앉으며 검은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하얗게 된 머리로 그 글자를 읽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욕실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그의 엄마가 욕실 문을 벌컥 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걱정 어린 물음에 오이카와는 “엄, 엄마.”하고 말을 더듬거리며 자기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빨갛고 하얀 얼룩덜룩한 얼굴로 “이와쨩이…….”하고 말했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결국 엄마를 욕실 밖으로 내보낸 후로도 오이카와는 한참이나 욕조에 앉아있었다. 간신히 욕실을 빠져나와서는 핸드폰을 들고 방을 굴러다니며 이와이즈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일 만나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나은지 고민하기 바빴다. 수시로 손목에 생긴 글자를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문질러보았지만 더 이상 부어있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지워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기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면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오늘은 한숨도 잘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부스에서 호박님의 이와오이 소설 「봄의 이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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