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무화과 꿈
안드로이드AU.
이와오이 교류회에 내려고 했다가 중도포기했던 글 다시 써서 올립니다
제목은 시에서 가져왔어요 관련 없습니다(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커튼이 펄럭이는 자리에 앉으면 바람에 온몸이 나부낀다.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도, 오이카와가 손수 골라준 옷도 모두 끊임없이 흔들린다. 바람의 방향과 온도가 수치화 되어 머릿속에 빠르게 입력되었다. 바람은 북쪽으로 불고 있으며, 온도는 어제보다 낮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싫어하던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늘한 바람을 움켜쥐다가 도로 펼쳤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말하는 ‘손을 펼치다’의 의미보다 한층 나아가 피부조직을 뒤집어 내부에 위치한 기계를 꺼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 다섯 개만 허무하게 펼쳐질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수많은 무기들이 피를 닦기도 전에 몸 안을 들락거렸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감은 채 몇 년 전을 떠올렸다. 떠올린다는 건, 저장된 영상을 되감아보는 것이다. 전장의 선두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인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과도한 수리와 해체의 반복으로 망가진 영상이 많았지만 식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기들 사이에는 몸을 잔뜩 웅크린 민간인도 있었고, 몸이 갈가리 찢긴 짐승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보다 한참 뒤에, 이와이즈미의 기록 중 가장 끝 언저리부터 기록되어 있다. 조금도 망가지지 않아 선명한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꿈을 경험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오로지 그것만 남는다. 무기도 시체도 없이 오이카와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영상기록을 훑던 이와이즈미가 눈을 뜬 것은 침실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와쨩, 하고 부르는 소리가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끈질겼다. 이와이즈미는 몸을 일으켜 침실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와쨩, 어디 있어?”하는 목소리가 선명해져갔다. 문을 열고 침대 앞에 섰다. 침대 옆 협탁에는 종이들이 흩어져 있고, 그 위로 휴대폰이며 다 식은 녹차가 성의 없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를 부른 주인공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고개만 밖으로 내밀었다. 잠기운 가득한 눈이 이와이즈미의 뾰족한 머리부터 자기가 볼 수 있는 데까지 쭉 훑어 내렸다. 오이카와는 이불 속에서 손을 빼서 이와이즈미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워.” 오이카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도로 떴다.
“또 밖에 있었구나? 이와쨩은 혼자 두면 꼭 베란다에 앉아있더라. 거기가 왜 좋아?”
“시원해.”
“더우면 에어컨 켜라니까. 바닥에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 아플 텐데 의자 하나 살까? 아니야, 두 개를 사자. 날이 더우면 베란다에서 같이 맥주 마시는 거야. 시원하고 좋을 걸? 아, 여름 다 갔지. 갑자기 아쉽네. 이와쨩도 이제 조심해야해. 한겨울에 베란다 나가면 감기 걸려.”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 앞에 그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안드로이드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맥주를 마시지도 못한다고 답하면 오이카와의 눈매가 축 쳐지기 때문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걸 보면 ‘감정’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이불을 조금 젖히고 이와이즈미의 손을 끌어다 자기 앞에 두었다. 두 손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지다가 손바닥에 입술을 꾹 찍은 다음에는 자기 손과 맞잡아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또 눈앞에 두고 손톱이며 손가락 마디마디를 만지작거린다. 오이카와는 자주 이런 행동을 했다. 언젠가 그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건 무슨 테스트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오이카와의 화난 얼굴만 봐야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손장난에 몰두하는 사이, 이와이즈미는 협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리되지 않은 종이에는 안드로이드와 전쟁, 그리고 그와 관련된 법이 다닥다닥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배구선수의 방은 아니었다. 반듯하게 정리해둘까 싶어 손을 뻗었는데, 반대편 손이 쭉 끌려간다. 돌아보니 오이카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놀아.”
“좀 더 자.”
“왜 나를 재우려고 그래?”
“너는 통계적으로 봤을 때 수면시간이 너무 짧아. 운동선수니까 자기 몸에 더…….”
“정 그러면 이와쨩이 재워줘. 이리 와서 안아줘.”
애교 섞인 부탁을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게 무엇이든 오이카와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오이카와를 두 팔로 안았다. 오이카와는 익숙하게 이와이즈미의 팔에 기대고 등을 마주 안았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헤실헤실 웃으며 이와이즈미의 턱이며 뺨에 코끝을 부볐다. 그때마다 오이카와의 숨과 입술도 피부에 닿았다.
“아, 행복하다. 이와쨩 팔베개 너무 좋아.”
오이카와는 군인들과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많이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자기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이카와가 처음이었다. 그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행복하다고 말하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내비치는 감정이 모두 달랐다. 이처럼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말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양 팔 가득 장을 보고 힘겹게 짐을 옮기며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가지고 놀다 웃으며 그 말을 했고, 아주 가끔이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이와이즈미는 그 말이 사전적 의미와 왜 이렇게 다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아래에서 오이카와가 천천히 잠에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손을 올린 채 맥박의 속도를 가늠하다가 그가 완전히 잠들었을 때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피곤에 찌들어 잠든 집주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집안일 정도였다. 차라리 집에 강도가 들면 조금 더 쓸모가 있겠으나, 전쟁 후에 치안이 아주 빠르게 안정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안일이 그리 만만한 것 또한 아니었다. 특히나 이와이즈미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오이카와에게 명령을 내려달라고 하자 그는 아주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싫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존댓말도 하지 마. 그리고 앞으로는 ‘이와쨩’이라고 부를 거야.”
이와이즈미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상하관계에 대해서 논하며 그것이 얼마나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으나 첫 마디를 마치기도 전에 저지당했다. 오이카와는 그 어떠한 반론도 듣지 않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군식구를 들이기에 오이카와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휴대폰은 매일같이 불이 났으며 집을 찾아오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오이카와는 외출이 잦았고, 집에 돌아왔다가 도시락 사오는 것을 깜박했다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수두룩했다. 그러던 오이카와가 별 생각 없이 “이와쨩, 그릇 좀 치워줄래?”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는 정말 급히 나가야했고, 설거지를 할 시간이 없었으며, 어느 집이든 그 정도 부탁은 해가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에 돌아와서 모든 그릇이 산산조각 나있는 것을 보았을 때 당황한 것 또한 매우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한참동안 부엌에 서있었다. 그의 대단한 점은 이와이즈미가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금방 떠올려내고는 느리게나마 박수를 쳤다는 것이다.
“와아, 전부 치웠네. 무기도 없을 텐데 정말 잘했어, 이와쨩…….”
오이카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와이즈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마를 긁적이며 사과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물었다. 오이카와는 설거지 시범을 보여주려고 했으나 집안에 남은 그릇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마저 못했다. 두 사람은 함께 유리조각을 치운 후에 그릇을 사러 나갔다. 오이카와는 그 날도 피곤한 얼굴로 “행복해.”라고 말했다.
저녁 메뉴를 카레로 할까 고민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간의 노력 덕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하고 싶은 것만 해.”라고 말했지만 이와이즈미 스스로 도움이 되길 원했다. 그는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빨래를 했으며, 밥상을 좀 더 보기 좋게 만들었다. 이와이즈미는 부엌에서 카레가루를 뒤적거리다가 야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냉장고 문에 붙여놓은 종이를 보아하니 그 외에도 살 것들이 제법 됐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썼다.
카레에 넣을 재료와 몇 가지 물건, 그리고 오이카와가 가장 좋아하는 빵을 샀다. 더 살 것이 없나 둘러보다가 몇 사람이 어중간하게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있었기에 이와이즈미의 시선 또한 그쪽을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듯한 정장, 튀지 않는 색의 넥타이, 초췌한 뺨. TV 속의 오이카와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떠맡긴 것은 우리입니다. 영웅이 그러했듯 어린아이를 보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보호합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에 감동하고, 희망을 얻지 않았습니까? 한 때는 제 소중한 사람을 전투기계로 되살려낸 정부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이제는 버팀목이 필요했던 마음을 이해합니다. 다만 이번 정부의 처사, 이와이즈미를 영원히 박물관에 감금하겠다는 발언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많은 사람을 죽이게 해놓고, 이제는 평생 유리관에 갇혀 상징 놀이나 하라는 겁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영상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TV 속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방금 전 영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 남자가 목을 가다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정의 여론이 지배적이지만 고작 한 체뿐인 안드로이드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오로지 ‘감정’만 놓고 논하는 것은…….” 이와이즈미는 그 남자의 말을 전부 듣지 못하고 걸음을 움직였다. 누군가 일행에게 “그 배구선수 죽은 다음에는?”하고 물었다. 그러자 여태껏 들었던 수많은 속삭임이 귀에 달라붙는다. 전원을 끄면 되잖아. 그 선수 죽은 후에 회수하면 될 문제야. 무기를 다 뺐으니 이제 깡통이나 다름없지? 그냥 줘버려. 목소리들은 마치 늪처럼 질척였다. 그 자리를 자박자박 걷는다. 등 뒤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사람들만 보였다. 분명 나사가 떨어지는 소리였는데…….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귓바퀴와 귓불을 만진다. 오늘은 쓸모없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이와이즈미는 환청을 뒤로한 채 걸음을 서둘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물건이 쏟아졌다. 베개며 인형이며 담요까지 전부 푹신한 물건뿐이다. 그래도 열심히, 자기 분을 가득 담아 던졌다. 이와이즈미는 한 팔로 막다가 그냥 가만히 서서 물건을 맞았다. 그러자 오히려 오이카와가 놀란 눈을 하고 행동을 멈췄다. 잠들 때까지만 해도 얼굴색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어디는 하얗고 어디는 빨갛다. 파리한 얼굴 중에 눈이 제일 빨갰다. 오이카와는 베개를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아래로 쏠린다.
“왜 또 말없이 나가? 왜?”
목소리에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담는다. 이와이즈미는 짐을 내려놓고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포옹을 좋아했다. 마주 안으면 금방 행복을 속삭이고는 했다. 이번에도 고동이 차츰 가라앉는다. 분을 참는 듯 숨소리가 나다가도 코를 훌쩍이며 차분한 숨을 뱉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데려갔다. 오이카와가 휴지를 끌어안고는 얼굴을 닦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장본 것을 정리하고 카레를 만들었다. 따끈한 밥 위에 카레를 얹어 식탁으로 가져가자,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괜찮아.”
“화내고 싶으면 화내도 돼.”
정말로 화나지 않았다. 협탁이나 식탁에 나갔다 오겠노라 메모라도 해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마주 앉았다. 그는 아직 카레에 손 한 번 대지 않고 있었다.
“나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나가도 돼. 돌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가도 좋아. 하지만 밖은 너무 위험하니까 걱정이 돼서…….”
전쟁이 끝난 후 기적처럼 치안이 안정된 이 나라를 오이카와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치안이 인간만을 위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가 숟가락을 쥐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오이카와를 보는 동안에는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정갈하게 카레와 밥을 섞어 가장자리부터 떠먹는 모습을 본다. 음식을 가리는 것이 없어 무슨 야채를 넣어도 쏙쏙 잘 먹었다. 오이카와가 편식을 했다면 공부할 게 더 많았을 것이다.
“오이카와, 날 숨겨도 좋아.”
숟가락질이 멈췄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어 이와이즈미를 보았다.
“평생을 유리관에 갇혀 사는 건 끔찍하지만, 한 달에 한 번 네가 찾아온다고 약속해준다면 분명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살며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떠오르는 말이 있었지만 차마 쓸 수 없는 까닭이다. 목덜미 아래 맥박이 뛰지 않아도 그 말을 쓸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손을 떨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입을 열 수 있었다.
“네 방 상자에 갇혀 평생을 살게 된다면 그게 나의 행복이야.”
오이카와는 두 손바닥으로 자기 눈을 꾹 눌렀다. 손목 아래로 꼭 깨물린 입술이 보였다. 턱이 하얗게 질리고 몸을 떨었다. 오이카와는 자꾸만 “눈이 아파.”하고 투덜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이카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는 울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울면 눈이 아프다는 걸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눈꺼풀 위에 입 맞출 수는 있다. 그건 결코 오만이 아니다.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냈다. 축축한 눈동자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를 처음 만난 것은 세 달 전이었다. 종전부터 몇 년 간, 이와이즈미는 몇 명의 연구원과 연구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떤 날은 몇날며칠이고 작업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차림새로 타인의 앞에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기에 전원을 꺼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거절당했다.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보고, 온몸의 피부껍질이 갈라지는 것을 보아야했다. 그들은 배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가슴에서 자폭장치를 꺼낼 때는 연이어 실패해서 몇 번쯤 죽을 뻔했다. 물론 이와이즈미가 아니라, 연구원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결국 자폭장치는 제거되었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작업대에 걸터앉아 연구원의 말을 들었다. 기쁜 목소리였다.
“넌 이제 박물관에 전시될 거야. 그러면 영원히 영웅으로 기억 돼. 이건 사람도 못하는 일이야. 대단하지?”
이와이즈미는 옷을 달라고 했다. 연구원은 의자에 걸쳐있던 가운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걸 어깨 위로 걸치면서, “전원은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었다. 연구원은 이번에도 웃었다. 기뻐보였다.
“당연히 켜둬야지. 아이들이 멋있어 죽으려고 들면 한 번씩 쳐다봐줘.”
“전쟁이 완전히 끝났습니까?”
“그래.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전쟁을 글자로만 알겠지. 정말 기쁜 일이야.”
이와이즈미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인상을 썼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전쟁이 다시…….’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연구원은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토닥이며 연구실을 나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아무도 연구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이와이즈미에게 어떤 영상을 보여주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였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꼭 아픈 사람처럼 눈 아래가 거뭇했다.
“이 사람 알아?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야. 국제 팀 배구선수.”
“모릅니다.”
답은 단박에 나왔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연구원은 “그렇지?”라며 연구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대로 연구실 문이 한동안 열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흐른 후에, 이와이즈미는 옷을 갈아입은 채 연구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주어진 새카만 정장은 생전 처음 입어보는 것이었지만 입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저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박물관 한 자리에 붙박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 도착한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어느 강당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무대 정중앙에 서서 쏟아지는 질문을 받았다.
안드로이드가 맞습니까? 감정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람을 죽일 때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아군이 죽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자폭장치를 사용할 위기는 몇 번이나 찾아왔습니까? 그 때마다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이와이즈미는 하나하나 답했다. 슬펐습니다. 우울했습니다. 놀랐습니다. 또다시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영원한 명예를 얻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이와이즈미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전쟁이 다시……. 입안에서 말이 빙글빙글 돌다가 목구멍을 때렸다. 이와이즈미는 목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대 쪽으로 달렸다. 진행자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진행자가 쥐고 있던 마이크를 뺏어들고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짧은 거리를 달렸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있었다.
“박물관에 감금되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죠?”
아, 그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영상 속의 남자였다. 그때와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여전히 많이 아파 보인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양새가 어른스럽지 못했다. 달래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큼 말문도 쉽게 트였다.
“네.”
“무엇이든?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는 일이라도?”
“전 늘 낯선 사람을 따라가며 살아왔습니다.”
더 이상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연구원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 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에게 “사실 박물관에 가고 싶다고 해.”라고 명령했고, 이와이즈미는 거절했다. 머리 위로 욕이 쏟아지는 동안 눈을 감았다. 울 것 같았던 오이카와의 얼굴만 수없이 떠올렸다.
한 달 후에, 경호원에게 양 팔을 붙잡힌 채로 차에 탔다. 그 모양새가 아주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꼼짝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들었다. 한참을 달려 어느 장소에 내렸을 때 좌우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이 쏟아졌다. 오이카와 토오루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원본인 영웅 이와이즈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이즈미는 무엇도 답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TV 인터뷰에서 보던 정장이 아니라 깔끔한 캐주얼 복장으로 이와이즈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오이카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뛰쳐나와 경호원들을 떼어냈다. 화가 나 보였다. 그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자기가 서있던 자리까지 앞서 걸었는데, 다른 한 쪽 손으로 자꾸만 얼굴을 비볐다. 그것이 눈물을 어찌하지 못해 그랬다는 것은 잠시 후 얼굴을 마주보고서야 알았다.
안드로이드가 영웅의 친구에게 넘어가던 날, 그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자리에서 오이카와는 내내 울었다. 자기가 울 거라는 걸 잘 알았는지 그의 큼직한 주머니에서는 끊임없이 손수건이 나왔다. 하나를 빼서 얼굴을 닦다가, 또 하나를 뽑아서 코를 풀고, 다시 하나를 빼서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마다 발치에 손수건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그 모습이 꼭 줄줄이 매달린 사탕 같았다. 그 순간의 영상은 늘 기억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걸 꺼내볼 때마다 마음에 차오르는 감정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오이카와는 도로 침대에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 자꾸만 이와이즈미를 부르며 함께 자자고 졸랐다. 그런 날이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의 그가 아닌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오이카와가 말해주는 영웅은 아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한때는 나란히 배구선수가 되자고 꿈꿨던 시절도 있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하다가 이와이즈미를 돌아보며 그에게 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죽으면 박물관에 가게 돼.”
오이카와의 얼굴이 한순간에 흐려졌다. 그의 뺨과 목덜미를 쓸어내리다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런 나도 꿈을 꿀 수 있다면, 네 무덤에 묻히고 싶어.”
언젠가 오이카와가 죽는 날이 오겠지. 그 후에도 이와이즈미는 나날이 낡아가기만 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무엇도 눈에 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아주 긴 꿈을 준비하고 있다. 그와의 만남부터 죽음까지 이르는 시간을 영원히 되감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