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귀가
시츄 주신 다비님 아리가또!
문을 열고 들어가 “다녀왔어요.”하고 인사를 했는데도 안쪽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관에 신발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의아한 얼굴로 배구화를 벗어 내려놓았다. “스가와라 씨?”하고 부르며 안으로 들어가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 후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난히 옅은 머리와 잔뜩 수그러진 등 위로 덮인 담요였다. 카게야마는 살금살금 걸어가 그 옆에 섰다.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포갠 두 팔 아래로 책이 깔려 있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옆에 놓여있는 두 자루의 펜을 손가락 아래에 굴렸다. 책상과 펜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그러나 이 방에서만큼은 가장 크게 들렸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고작 그런 인기척에 눈을 뜨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깨우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가 관두었다.
카게야마는 선수생활 때문에 한동안 외국에 나가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서로가 보고 싶었던지 그냥 통화는 물론이거니와 영상통화도 수없이 했다. 타지에서 배구도 열심히 했지만, 이따금 몸이 고될 때면 스가와라 생각이 간절했다. 둘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 그와 먹는 저녁을 늘 상상했다. 스가와라와 같이 먹는 매운 떡볶이는 혀는 힘들어도 서로의 빨간 코를 보며 웃는 재미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것을 상상하며 귀국했다. 마지막으로 스가와라와 통화를 했을 때, 스가와라가 기뻐하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잔뜩 느껴져서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이 어디 상상에 꼭 들어맞던가.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려다가 꾹 참았다. 솔직히 스가와라의 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게야마가 외국에 나간 것이 그의 일로 바빴던 것이라고 치면, 카게야마가 돌아온 지금은 스가와라가 그의 일로 바빴다. 그 때문에 카게야마는 그가 꿈꿨던 스가와라의 시간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참 서운한 일이었다.
스가와라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움찔움찔 떨렸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스가와라는 숨소리를 크게 내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얼굴에 가져다대고 느릿하게 문질렀다.
“많이 피곤해요?”
“카게야마?”
스가와라의 어깨가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아, 깜짝 놀랐어. 인기척 좀 내지.”
“냈는데, 스가와라 씨가 세상모르고 잠들었잖아요.”
“그랬나? 언제 잠들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나.”
스가와라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힉 소리를 내며 놀라했다. 아까 깨웠어야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곤한 얼굴을 보니 이번에는 더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더러 바쁜 일 따위 뒤로 하고 ‘나랑만 놀아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서운해도 하는 수 없었다. 어서 스가와라의 일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저 거실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어? 내 시중 들어주는 거야?”
스가와라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게야마는 머뭇거리며 스가와라 앞에 고개를 숙였고, 스가와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리 위로 한숨소리가 들렸다.
“얼른 다 끝내고 너랑 놀고 싶다.”
그 노곤한 목소리가 어찌나 달게 느껴지던지, 카게야마는 입안에 작은 사탕을 문 기분이 들었다. 냉큼 “저두요.”하고 답하려는데, 카게야마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스가와라는 눈짓으로 받으라고 말하며 도로 펜을 쥐었다. 그 뒷모습을 보자니 또 다시 씁쓸함이 일었다. 카게야마는 전화를 받기 위해 방을 빠져나왔다. 액정 위에 떠오른 이름은 팀 동료였다. 오늘 연습은 이미 끝났고 내일 연습도 평소처럼 이어질 텐데 굳이 전화할 일이 뭐가 있나 싶었는데, 귀국하고 한 번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으니 이번에 모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있는 방의 문을 응시하다가 알았다고 했다. 방안에서 “약속 잡혔어?”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통화 내내 별 답이 없었는데도 다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방으로 다시 들어가 “다녀올게요.”하고 인사하니 스가와라가 뒤로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너무 늦지 마.”하는 통상적인 말에는 염려가 섞여있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말대로 늦게 들어올 생각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음주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배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밖에서 싸돌아다닐 이유를 좀처럼 찾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술자리에서 도망치는 요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간만의 술자리라고 다들 어딘가 나사 하나씩을 풀고 왔는지 술잔을 요목조목 따져서 빈 잔이 없도록 했다. 카게야마는 또 그걸 주는 대로 넙죽넙죽 마셨다. 그러다 보니 괜히 코끝이 시리고 속이 타는 것이 안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듯 허전하였다. 카게야마는 술잔을 쥔 채로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제가 애인이 있는데요…….”
어쩌다가 시작하게 된 이야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붙임성 없는 팀 막내의 연애담은 술에 취한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카게야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나 맞장구를 잘 치는지, “일찍 들어오라고 했거든요.”라는 말 하나만으로 거대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카게야마는 그 속에서 내심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을 하나하나 뱉어놓았다. 듣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는요, 많이 바라는 건 아니고, 아무리 바빠도, 응? 간만에 보니까, 외식이라도 한 번 했으면, 했으면 하는데…….”
처량 맞은 목소리는 술자리에서도 내내 이어졌고, 택시 안에서도 이어졌고, 택시에서 내려서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도 이어졌다. 그것이 뚝 끊어진 것은 스가와라와 둘이 사는 집앞에 섰을 때였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도어락을 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컴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밝았다. 그리고 거실에는 스가와라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저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전화는 왜 안 받아?”
“이렇게 늦었는데?”
스가와라는 자기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는 카게야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너 술 많이 먹었어?”하고 물었다.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딴 소리를 해댔다. 그것만 봐도 이미 술 많이 먹은 것은 확정이었다. 평소보다 말이 배는 많았다. 스가와라는 꿀물이라도 타올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카게야마가 냉큼 달려와 스가와라의 옆에 앉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스가와라 씨.”
카게야마는 여태까지 어린아이처럼 물어대던 것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그의 연인을 불렀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자기 가방을 뒤적거렸다. 스가와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카게야마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카게야마가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손톱깎이와 귀이개 같은 간단한 미용용품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그는 그것을 스가와라 앞에 공손하게 내밀었다.
“저 귀 파주시면 안돼요?”
“뭐라고?”
“무릎베개하고 싶어요. 계속 하고 싶었는데…….”
이것 참 뭐라고 말해야할지. 스가와라는 벙이 쪄서 한동안 무슨 말을 못 꺼냈다. 하지만 이윽고는 카게야마가 내민 상자를 손에 쥐고 바닥에 엎드려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 생각해보면 귀를 파달라는 건 무릎베개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싶어 만든 구실일 것이다. 그러면 뒷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데, 술에 취한 카게야마는 준비한 말과 제 속마음까지 고스란히 내보였다. 술에 취해도 어쩜 이리 그다운지, 스가와라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졸음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멀뚱히,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카게야마의 뒷목을 잡아 제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술에 취한 카게야마는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와 스가와라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우리가 이럴 시간도 없었구나.”
스가와라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카게야마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상자를 열어 귀이개를 꺼내 카게야마의 귓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며칠 전에 이미 청소를 한 것인지 나오는 것도 없었다. 이런 걸 구실이라고 찾아오나 싶어 또 웃었는데, 그 사이에 카게야마는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다. 스가와라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 또한 덩달아 잠이 몰려왔다. 허벅지에 닿는 무게감이 나른하고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