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앞에서 이와이즈미가 걷고 있다. 나보다 조금 작은 키, 조금 넓은 어깨, 운동하는 남자애답게 그을린 뒷목. 시선은 차분히 이와이즈미를 훑는다. 까만 뒷목 언저리에서 자라난 짧은 머리카락을 바라볼 적에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 뒷모습이 조금 멀어지는가 싶더니 앞에서 홱 돌아본다.
“너 왜 이렇게 맥없이 걷냐?”
이럴 땐, ‘이와쨩, 혹시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거 아니야?’라고 묻고 싶어진다. 앞에서 걷고 있는 주제에 어떻게 내가 설렁설렁 걷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이와이즈미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내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좋은 척을 하고 있는지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동적이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품게 한다. 사실 나는 이와이즈미를 볼 적이면 늘 그런 기분이 든다.
결국 이와이즈미의 다리가 내 엉덩이를 찼다. 앞으로 기우뚱 거리며 어어 거리고 있으니 이와이즈미가 한 팔로 나를 붙잡았다. 병 주고 약 주고가 너무 확실해서 “너무해!”하고 외쳤다. 그러자 이와이즈미가 “정신 좀 차리고 걸어.”라며 내 옆으로 섰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다시 그를 한 걸음 앞서 걷게 했다. 그러자 그가 또 다시 돌아본다. 눈매가 사납게 올라가는데도 그 속에 품은 걱정이 훤히 보였다.
“뭐 고민 있냐? 혼자 싸매지 말고 말해봐.”
눈 두어 번 깜박이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재촉하지 않았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쑥 집어넣은 채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시선은 꼭 나를 향해 서있다. 지금의 그는 ‘오이카와만을 위한’ 이와이즈미다. 이럴 때면 오이카와는 두 가지 상상을 한다. 첫 번째 상상은 ‘이와쨩, 나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상상은 꺼내놓은 말에 비해 꽤 평온한 장면을 그려낸다. 내 말을 들은 이와이즈미는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망설이다가 ‘어떤 의미로?’라거나 ‘남자를?’ 같은 다소 바보 같지만 당연한 물음을 할 것이다. 내가 답하면 속상한 얼굴을 하고서는 ‘너 좋다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말을 하겠지. 그 말에는 나에 대한 혐오나 불신은 담겨있지 않다. 십 년 넘게 봐온 소꿉친구의 반응은 너무 뻔해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려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상상은 이렇다. 내가 이와이즈미를 붙잡고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장담하건데 나는 얼음물에 빠진 사람처럼 온몸을 덜덜 떨 것이다. 몇 번이나 연습한 고백 멘트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좋아한다는 말만 하겠지. 어쩌면 이와이즈미는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답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대고 친구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아야할 것이다. 그 상상은 아주 무섭게 나를 덮친다. 오로지 나에게만 쓸려오는 파도와 같다. 나는 그 파도에 쓸리고 쓸려 결국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