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덜 여문 약속
제목 짓기 싫어서... ((돌연사))
가물가물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뒤통수 세 개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비비며 그 중 하나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시선 세 개가 한 번에 오이카와에게 쏠렸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엉켰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등에 기대어 있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사자인 이와이즈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앞에 부 일지를 내려놓고 있었는데 얼추 다 끝났는지 다른 3학년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가만가만 듣고 있자니 새로 들어온 1학년 하나가 부 활동에 여자친구를 자주 데려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데려오는 건 아무래도 좋은데 자꾸 여자친구한테 왔다갔다하니까 흐름이 끊겨. 주의를 한 번 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사실 여자 데려오는 거는 여기 주장 씨가 제일 심하지만.”
하나마키의 농담 섞인 말에 오이카와는 번쩍 눈을 뜨고 이와이즈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왔지만 말하는 모양새는 얄밉기 그지없었다.
“오이카와 씨가 잘생긴 걸 어떡해? 일부러 데려오는 게 아니라고.”
“예, 예.”
“시끄러워 망할 놈아.”
당연한 말이지만 빈축만 샀다.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와이즈미의 옆으로 가서 똑바로 앉았다. 목을 빼고 부 일지를 훔쳐보고 있자니 이와이즈미가 손끝으로 밀어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사내애처럼 마구잡이로 글씨를 쓸 것 같은 얼굴이지만 일지에 적힌 글씨들은 꽤 단정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팔랑팔랑 넘겨보며 빠진 것이 없나 확인했다. 그리고는 아까 거론된 1학년 이름 옆에 작게 체크표시를 했다. 오이카와도 슬슬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똑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배구 좋아하는 여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네.”
“그럴 거면 여자배구부에서 찾는 게 빨라.”
“틀려. 난 데이트만큼은 코트 밖에서 하고 싶어.”
이야, 그거 맞는 말이네. 웃음이 한 번 터졌다. 배구가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배구에 온 청춘을 쏟아 붓고 있는데 연애까지 코트 위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다가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코트, 그리고 코트, 또 코트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배구 좋아하는 여자친구’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은, 오프라고는 월요일밖에 없는 그들에게 연애란 시작부터 이해를 요구해야하는 거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혼도 배구 좋아하는 여자랑 할 거야?”
오이카와가 여전히 일지를 쥔 채 묻자 마츠카와가 “내 삶을 어디까지 배구에 쏟아 부으라는 거야.”라며 투덜거렸다.
“결혼할 쯤 되면 배구는 TV로나 보지 않을까? 아니면 동네 팀 할지도.”
“우리끼리 모여서 맥주 놓고 배구 경기 볼 지도 몰라.”
“헉, 아저씨 같아.”
“내가 보기에는 오이카와가 제일 빨리 아저씨가 될 것 같아. 이상한 여자한테 걸려서.”
“저주하지 마. 무서우니까!”
옆에서 떠드는 데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쥐고 있던 일지를 가져다가 뭐에 체크를 했는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일지를 덮고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오이카와까지 확인했으니 오늘의 일지 기록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와이즈미가 한가해진 것을 알고는 화살이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이와이즈미는 언제 결혼하고 싶은데?”
“아들 셋 딸 하나 낳고 무지 화목하게 살 것 같지 않냐.”
오, 맞아. 그런 이미지야.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가 당연하다는 듯 쿵짝을 맞추는 사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뺨을 보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이와이즈미는 펜을 빙빙 돌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오이카와를 보았다. 그리고는 “글쎄.”하고 말문을 열었다.
“의논해봐야지.”
‘의논’이라는 말에 네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깔렸다가 곧 야유인지 감탄인지 모를 탄성이 터졌다.
“미래의 아내를 벌써 배려하는 거야?”
“하긴, 이와이즈미 정도라면 아내가 행복할 지도. 솔직히 키도 작진 않고.”
“그럼, 작진 않지. 여자애들이랑 서 있으면 크다니까. 작진 않아. 덕분에 아들 셋도 작진 않을 거야.”
“너희가 말하면 진짜 재수 없으니까 그만 해라?”
하나마키는 자기 이마 앞에서 손날을 설레설레 흔들다가 이내 경례를 하는 척 “넵.”하고 장난스레 손을 세웠다. 이와이즈미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오이카와를 지그시 보았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꼭 물다가 시선을 돌렸다.
네 사람이 헤어진 것은 얼추 연습장 정리가 끝난 후였다. 사실 떠들지만 않았으면 훨씬 빨리 끝났을 텐데 조금 하고 쉬고 조금 하고 노닥거리느라고 하늘이 벌써 새까맸다. 1, 2학년 앞에서는 이런 모습 보이면 안된다고 한탄하면서도 결국 자기들끼리 있을 때면 ‘고작 고등학교 3학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넷이서 학교 앞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고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었다. 집 방향이 같은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만 여전히 함께였다. 오이카와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입에 문 채 다소 느리게 걸었다. 평소 같으면 왜 이렇게 꾸물 거리냐며 뭐라고 했을 이와이즈미도 말없이 걸음을 맞춰주었다.
여자애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는 자리에 가면 늘 오이카와가 있었다. 그건 그가 자라서나 아주 어렸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허연 얼굴 탓에 예쁘다는 소리를 곧잘 듣고는 하지만, 그거야 남자치고 예쁘다는 것이고 어릴 때는 정말 여자애로 착각할 만치 예뻤다. 예쁜 것만 보면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어린 나이에 오이카와는 참 고생이 많았다. 이와이즈미가 조그마한 손으로 여자애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가면 오이카와는 울상이 되어서는 얼굴에 빨간 크레파스를 묻히고 머리에는 딸기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를 발견하면 오이카와는 한결같이 “하지메쨩.”하고 부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면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여자애들을 훠이훠이 물리쳐 주었다.
“여자애들 너무 무서워.”
“걔들은 토오루가 좋아서 그래.”
“맨날 괴롭히는데?”
“다음에는 크레파스는 쓰지 말자고 해봐. 그러면 안할 거야.”
이와이즈미는 화장실 세면대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오이카와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나중에는 크레파스를 닦는 것보다 눈물 닦아주는 일이 더 힘들었지만 달래주니 또 금방 울음을 그쳤다. 오이카와는 손에 둘둘 만 휴지에 코를 흥 풀면서 “난 하지메쨩만 좋은데.”하고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콧등을 붉히면서도 “그야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지.”라고 답해주었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그치?”했다.
그런 대화를 나눴던 것이 벌써 10년 전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10년도 더 됐다. 오이카와는 그때의 덜 여문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기억은 해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자라면서 두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여자애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을 보고 어릴 때처럼 구하러 오지도 않았다. 갑자기 사라지지나 말라고 잔소리할 뿐이었다.
“오이카와, 그거 줘. 버리게.”
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아이스크림 막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오이카와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 이와이즈미의 손이 가까이 와서 막대를 쏙 채갔다. 그리고는 길가에 놓인 쓰레기통에 자기 것과 함께 버렸다. 그러면서 “멍 때리고 걷지 말고.”라며 핀잔을 주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옆으로 가까이 걸으면서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와쨩, 나랑 결혼할 거야?”
“어.”
“내 의견은 안 물어봐?”
그렇게나 어릴 때의 약속인데 확인 절차도 없어? 하는 물음이었는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찌나 또박또박하게 말하는지 묻는 쪽이 다 이상해보일 정도였다.
“약속 깨려고?”
“이와쨩은 바보야? 보통은 그런 약속 잊어버려.”
“너도 안 잊었네, 뭐. 가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앞으로 이끌리다가 손을 쭈욱 빼서 이와이즈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앞에서 잠깐 돌아보는가 싶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다가 참 고민이라는 듯 말했다.
“나는 아들 셋에 딸 하나 낳을 줄 모르는데.”
“나도 그래.”
“엇, 이와쨩 지금 좀 멋있어.”
“참 이상한 타이밍에 그런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말투에 오이카와는 웃음이 터졌다. 이와이즈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이카와는 아까 했던 생각을 훌훌 털어놓았다. 이와쨩이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라거나 우리 그때 엄청 어렸잖아, 같은 말이 대부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말을 고스란히 들으며 고작 “그렇긴 하지.” 정도의 답을 했다.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투였다. 그건 기분 좋은 무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