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시선 닿는 곳
오늘 글 두 개 쓰고 싶었는데 바들바들버들버들바버바버
둥글고 단단한 공이 날아온다. 반듯하게 모은 두 손이 공을 위로 들어올렸다. 늘 요란하던 연습장이지만 아직 아침연습이 시작하기 전이라 아사히와 스가와라 둘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끔하게 준비를 해두고 가볍게 몸을 풀 겸 공을 주고받았다. 가볍다고는 해도 몇 번 공이 오가기 시작하면 심장은 금방 뛰어올랐다. 스가와라는 공을 쫓던 눈을 옆으로 힐끔거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공은 코트로 내리꽂혔다.
“미안.”
“잠 덜 깼구나?”
다이치라면, 혹은 니시노야라면 어째서 집중하지 않느냐고 혼쭐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히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스가와라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공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며 민망한 듯 웃었다.
“아니면 무슨 일 있어? 고민이라거나.”
물어오는 말에 걱정이 묻어났다. 스가와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참아온 말은 입안에 가득 문 물처럼 숨이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3학년인 아사히라면 내내 품어온 이 고민을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스가와라는 공을 끌어안은 채 멋쩍게 입을 뗐다.
“실은 카게야마가 나를…….”
고민 끝에 꺼낸 말에 아사히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경청했다. 그 편이 더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겉모습 때문인지 듬직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저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아사히의 시선이 스가와라의 어깨 너머로 넘어갔다. 스가와라는 등줄기가 쭉 뻗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카게야마가 문을 붙잡은 채로 서있었다. 빤하게 닿아오던 시선과 마주하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다. 명백한 외면이었다.
“어, 카게야마 왔네. 어서와.”
“안녕하세요.”
카게야마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는 동안 아사히가 그를 반겼다. 묘하고 불편한 기류가 연습장 밑바닥에 깔렸다. 스가와라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기는 하였으나 머릿속에서는 ‘자기 이름 말하는 거 들었을까?’, ‘뒷담화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만약 오해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푸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의 뒤를 이어 다른 부원들이 오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에게 다가가던 스가와라는 걸음을 세우고 부원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몇 번이고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고, 카게야마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때마다 스가와라는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스가와라와 카게야마가 처음 만난 것은 올해 초, 지금은 여름방학이니 벌써 반년 쯤 함께한 셈이었다. 부원 모두 꾸밈없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1학년이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팀 분위기는 자리를 잡았다. 어느 정도 삐걱대는 것은 앞으로 성장하며 겪는 성장통으로 여길 수 있는 정도였다. 카게야마와 스가와라의 관계 또한 그것과 비슷한 곡선을 그렸다. 세터라는 같은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였으므로 남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실력을 인정했고, 카게야마 또한 스가와라에게서 더 배워가려고 했다. 그것을 직접 입밖으로 꺼내 이야기 나눈 적도 있는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팽팽한 듯 안정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스가와라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요즈음의 카게야마는 이상했다. 이상하다? 그 말은 맞지 않는 지도 모른다. 타인을 싫어하거나 불편해하는 감정문제를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니까. 스가와라는 홀로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 쉬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자신을 불편해할지도―더 나아가서는 싫어할 지도―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인 태도를 보아서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데, 딱히 카게야마가 싫어할 만한 짓을 한 기억이 나지 않아 더 고민이었다.
세터끼리 의논을 할 때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바닥에 내려놓은 종이를 바라보거나 혹은 다른 곳, 이를테면 한창 연습 중인 팀원들 쪽에 시선을 두었다. 처음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카게야마.”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다그쳤는데, 그렇게 해도 결과는 같았다. 사과는 했지만 시선은 여전했다.
또 언제는 1학년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려고 카게야마의 반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굳이 카게야마였던 이유는 1학년 중에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해봤기도 하고, 세터이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반 뒷문에 서서 그 반 여자아이에게 카게야마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이름을 들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한 번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렸다. 스가와라는 그런 카게야마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아주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가와라에게로 다가왔다. 그 일련의 과정에 어떠한 위화감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카게야마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미안한데, 이거 1학년 애들끼리 적어서 나한테 가져와줄래?”
카게야마는 금방 수긍한 채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잘 부탁한다는 말에 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보며 수다스럽진 않아도, 과묵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위화감은 그 종이를 시미즈가 들고 돌아왔을 때 단단해졌다. 평소와 같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종이를 건네는 모습에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활짝 웃을 수가 없었다.
“혹시 이거, 카게야마가 들고 왔어?”
“응, 너한테 가져다 달라던데.”
“그렇구나. 고마워.”
혹시 지나가는 길에 만났느냐고 묻기가 어려웠다. 그랬다가 ‘아니. 우리 반으로 찾아왔어.’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카게야마가 자기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에 대고 못을 박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는 채로 벌써 한 달이었다. 스가와라는 연습 도중 잠시 빠져나와 드링크를 입에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카게야마에게 닿아있었다. 잠시 굽었다가 길게 뻗는 팔이 정확한 토스를 이루어냈다. 진중한 얼굴로 연습에 임하다가도 주변에서 조금만 놀려먹으면 곧바로 반응이 왔다. 분명 예전에는 스가와라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스가는 배치된 의자에 앉아 카게야마를 빤히 보았다. 그러던 중 카게야마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찾는 거지? 하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게야마의 시선이 스가와라에게 와 꽂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카게야마는 마치 불에 덴 듯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너무 노골적…….”
옆에서 쉬고 있던 부원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되면 ‘불편할 수도 있지.’정도로 끝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공이 오다니는 코트 위로 걸어 들어갔다. 묘한 움직임에 부원들의 시선이 스가와라에게로 쏠렸다. 누군가는 공을 받으려다가 불쑥 나타난 스가와라 때문에 코트 위로 공을 떨어뜨렸다. 카게야마 역시 시선을 느낀 듯,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았다.
“카게야마, 나랑…….”
이야기 좀 해. 그렇게 말하려는 참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무시당하는 것은 더 이상 싫었고, 좋은 후배 하나 잃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대화로 풀자!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카게야마는 놀란 눈을 어디다 둘 줄 몰라하고, 부원들은 스가와라와 카게야마를 보느라고 연습의 흐름이 끊어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여기서 카게야마를 끌고 밖으로 나가면 다들 싸운다고 생각하겠지. 스가와라의 머릿속에서 팀 분위기가 아작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안 된다.
“나랑…….”
“예?”
“연습 끝나고, 따로…… 토스 연습 같이 할래?”
한 달을 참았는데 하루, 아니 몇 시간을 못 참을 리가 없다. 둘이 남아 토스 연습이라도 하고 있으면 이야기할 기회가 날 것이 분명했다. 문제라면 카게야마가 약속이 있다며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카게야마는 쭈뼛한 고개를 꺾어 끄덕거렸다.
흐트러질 뻔했던 분위기는 곧장 바로잡혔다. 듬직한 주장과 한 시도 기죽지 않고 목청껏 소리 지르는 분위기 메이커가 수두룩했으므로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 요란함 속에서 오로지 스가와라와 카게야마, 단 두 사람만이 고요했다. 둘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제 앞에 날아드는 공만 묵묵하게 처리했다. 스가와라는 수분 섭취를 하러 코트 밖으로 나올 때마다 시미즈에게 시간을 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게야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시간을 물을 때마다, 아니 뜬금없이 토스연습을 하겠다고 하는 것부터 팀원들 또한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 느껴왔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이 나머지 연습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자기도 남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나타가 팔꿈치를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타나카가 히나타의 뒷목을 잡고 새끼 고양이 나르듯 밖으로 데려갔다.
본래는 요란하게 삐걱거릴 연습장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닫히고, 결국 내부에는 카게야마와 스가와라 단 둘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알록한 배구공을 두 손으로 든 채 그것만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스가와라는 민망함을 달래기 위해 아까부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은 고작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는 침묵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머뭇거리다가 “음, 연습할까?”하고 물었다. 카게야마에게는 답이 없었다. 공에다가 뭐라고 써놓은 듯 고개가 푹 숙여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한 걸음 다가섰다. 묵직한 공기를 밀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사과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무슨 말이야?”하고 물었다.
“스가와라 씨를 곤란하게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아, 음.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날 피하던 게 맞아?”
내내 생각해오던 말이지만 막상 입 밖에 꺼내니 참 기구한 말이다. 카게야마는 곧장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고, 그것이 스가와라에게는 확실한 답이 되어주었다. 스가와라는 조금 울컥한 나머지 “왜?”하고 물었다. 카게야마는 힐끔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다른 사람보다 사납게 솟은 눈꼬리에 힘이 없었다.
“내가 불편해?”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불편하긴 하다는 말이구나.”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에 서툰 것은 여전했다. 말하기 곤란하면 그냥 아니라고 둘러대면 될 것을.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후배 앞에서 스가와라는 점차 마음이 침착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저 솔직한 입에서 싫어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말해줄 수 있어? 내가 뭐 불편하게 했어?”
“스가와라 씨가 뭘 어떻게 하신 건 아니에요.”
“그럼?”
천천히 답을 기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초조해하는 대신 의자에 가 앉았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스가와라의 발뒤꿈치를 따라 움직였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눈이 스가와라의 운동화 끈에, 바닥에 쓸린 빨간 무릎에, 짧은 바지 밑단에…… 천천히 위로 올라가 겨우 스가와라의 턱 끝에 가 닿았다.
“제가 불편한 이유를 말하면, 스가와라 씨도 제가 불편해지실 거예요.”
스가와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기 앉은 의자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널찍한 장내 안에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런 일 없어. 너도 와서 앉아. 천천히 얘기하자.”
“저는 스가와라 씨에게 좋은 후배인가요?”
“당연하지. 날 불편해하는 것 빼고는 엄청 자랑스러운 후배지.”
말을 하다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는 두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조금 더 올라와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했다. 정말 오랜만에, 오래도록 마주하는 것이었다. 침착하지만 어딘가 뜨거운, 그래서인지 날카로운 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 관계가 한 걸음 안정적인 궤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까지 스가와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 그게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카게야마는 아니었다. 스가와라가 기다리던 답 또한 그것이 아니었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수차례 그러했듯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는 배구공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천천히 자신의 짐을 챙겼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를 붙잡을 수도 없었으므로, 갈등은 이제야 겨우 시작되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감았다. 시선 닿는 곳이 어디도 없었다.